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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

자하연 2010. 10. 4. 13:12

남한산성 행궁




행궁터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0번지로 산성 로터리에서 서쪽으로 175m(해발 375m) 지점에 위치하였다.

행궁은 산성의 중심 건물로 상궐(上闕)과 하궐(下闕)로 구분되고 종묘와 사직에 해당되는 좌전과 우실을 갖추었다. 또 행궁 뒷편 언덕에는 재덕당(在德堂)이 있고(1688), 하궐 앞에는 한남루(漢南樓)라는 외삼문 누문이 있었다. 상궐은 내행전(행궁의 내전) 하궐은 외행전으로 구분된다.

남한산성 행궁터는 1999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1차 발굴조사를, 2000년에는 2차 발굴조사를 완료하였고, 2002년 12월 상궐 72.5칸(내행전, 남행각, 북행각, 재덕당, 좌승당 등 5동)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행궁터에 지어졌던  지상3층(산성호텔) 건물등 4개동을 매입하여 2002.11.23부터 10일간 헐어내었고 2004년 8월 하궐지의 발굴조사와 좌전(26칸)의 복원공사를 완료하였으며, 2005년 한남루지 및 행궁주변 일곽의 조사 완료 후 하궐복원공사를 마쳤다.

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조선시대 행궁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 제57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행궁은 1999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상궐, 좌전이 복원되었으며, 일부 건물지에서 초대형 기와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중요한 유적이다.

남한산성행궁은 북한산성행궁, 화성행궁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궁의 하나이다. 남한산성은 후금(後金)의 침입을 막고자 1621년(광해군 13년) 백제시대 이후의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는데 1625년(인조 3년) 행궁을 건립하였고 이듬해 완공하였다. 산성을 고쳐 쌓고 행전과 관아를 세우는 일은 총융사 이서(李曙 : 1580~1637)가 주관하고 목사 유림(柳琳 : 1581~1643)이 감독하였다.

『문헌비고』에 따르면 당시 행궁에는 내행전인 상궐과 좌우 부속건물, 익랑 등 72칸 반, 상궐의 삼문 바깥에 외행전인 하궐과 응청문(凝淸門), 내삼문 등 154칸이 있었다고 한다. 행전의 동편에는 객사인 인화관(人和館)이 있었다.

 1688년(숙종 14년) 상궐 뒤에 재덕당(在德堂)을 지었고 1711년(숙종 37년) 행전 북쪽에 종묘를 봉안하는 좌전과 남문 안에 사직을 봉안하는 우실을 지었다. 1798년(정조 22년) 행전 외삼문의 상루인 한남루(漢南樓)를 세웠고 1829년(순조 29년) 인화관을 수리하였다.
남한지의 “인조가 행전에 머물렀으며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영릉 참배시 이곳에 머물렀고 유수의 아문이 있는 곳이 아니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역대 왕들이 실제로 머물었던 곳이나 후에 유수의 치소(治所)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동남방향의 주축을 따라 지대가 높은 서편에 상궐을 세우고, 동편에 하궐과 정문을 차례로 배치하여 전통적인 삼문삼조(三門三朝)의 기본 궁제를 따라 건축하였다. 상하궐 좌우에는 행각을 동서 방향으로 시설하였고 행궁의 외곽 담장 내부에 상궐과 북행각지를 둘러싼 내곽 담장을 두었으며 상,하궐과 정원지 사이에도 담장을 두어 공간을 따로 구획하였다.

1999년 발굴조사 결과, 내행전인 상궐은 초석 배열로 미루어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 사방에 한 칸씩의 퇴를 두른 구조임을 알 수 있었으며 외행전인 하궐은 후대의 건물 축조로 인하여 교란된 상태이나 정면 7칸이 남아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비교적 초창기에 건립된 것으로 내외 행전과 부속건물, 누각 뿐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봉안할 시설까지 갖춘 가장 큰 규모의 행궁으로서 역대 왕들이 머무는 등 실제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광주시 문화관광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