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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 디자인에 세계가 빠져든다

자하연 2010. 9. 2. 03:08

[Weekly BIZ] [Cover Story] 伊 디자인에 세계가 빠져든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심장' 피닌파리나·카시나를 가다

 

페라리 디자인 '피닌파리나' 
전통·혁신… 대조적인 것의 조화 추구
디자이너도 이탈리아인·외국인 50%씩


명품 가구회사 '카시나'
박물관·증권거래소 인테리어까지
새로운 도전 통해 차별화된 능력 키워

 

'물과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Venezia). 이곳을 말하면 사람들은 운하와 곤돌라(Gondola·베네치아 전통 노젓는 배)부터 떠올린다. 연인을 태운 곤돌라 뱃머리에서 사공은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베네치아가 자랑하는 미(美)의 정수(精髓)는 다른 곳에 있다. 베네치아 북쪽 1.5㎞에 있는 무라노(Murano)라는 섬이 그것이다. '바포레토'라는 수상 버스를 타고 약 35분. 빼어난 풍광도, 장엄한 건축물도 없는 작은 섬이 나온다. 선착장에서 걸어 올라가니 뜻밖의 모습이 펼쳐진다. 수로 옆 좁다란 길을 따라 구멍가게처럼 늘어선 작은 공방(工房)들이다.

안을 보니 반백(半白)의 장인(匠人)들이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재래식 화로 옆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 흔히 '무라노 글라스(Murano Glass)'라고 불리는 전통 유리 공예품이다. 목걸이·팔찌·단추·테이블 소품 등 형형색색의 공예품들은 마치 야수파의 미술작품 같다. 13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들 공방은 수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탈리아의 디자인 저력은 무라노섬에 그치지 않는다. 파스타에서부터 패션·가구·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나라 전체가 디자인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라노에서만 50만명 이상이 활동 중인 이탈리아의 디자이너들은 여러 산업에서 300개 이상의 제품을 세계 1위 명품(名品) 반열에 올려놓았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탈리아의 디자인 DNA는 무얼까. Weekly BIZ는 그 비결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 두 곳을 찾아갔다. 자동차 디자인 업체인 피닌파리나(Pininfarina)와 가구업체인 카시나(Cassina)다.

두 회사 모두 무라노섬의 유리 공방처럼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작은 공방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완벽을 지향하는 장인 정신과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의 열정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글로벌 디자인 전쟁의 승자로 자리매김했다.

날렵한 몸매에 금방이라도 굉음을 내며 질주할 것 같은 빨간색 스포츠카 '페라리(Ferrari)'. 남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이 스포츠카를 디자인하는 곳이 바로 피닌파리나다. 올해로 창립 80주년을 맞은 이 회사는 자동차로는 처음으로 뉴욕 현대미술관에 영구 전시된 전설적인 명차(名車) 치시탈리아(Cisitalia·1945년에 나와 170여대만 생산됐다)를 시작으로 페라리·피아트·란치아·볼보 등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들과 손잡고 주로 스페셜카를 디자인하고 연간 2만대 정도를 직접 제작하고 있다.

이탈리아 자동차공업의 중심지 토리노시(市) 외곽에 있는 이 회사 본사는 대학 캠퍼스처럼 넓은 정원에 2~3층 높이의 건물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중앙 디자인 센터'란 건물에 들어가자 갈색 나무판자로 뼈대만 얽어놓은 페라리 스포츠카의 실물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창업자의 손자이자 회장인 파올로 피닌파리나(Paolo Pininfarina)는 자신의 아버지가 1960년대에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디자인은 종이에 스케치하는 게 전부였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디자인을 좀 더 철저히 분석하기 위해 이런 구조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어색한 부분을 깎고 또 깎고 다듬어 문제를 해결한 것이죠."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그만의 노하우는 "10명의 팀원이 있다면 10명 모두의 인생 스토리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 디자이너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했다면, 다른 디자이너는 해외 유학을 다녀왔고, 또 한 사람이 기계공학을 전공했다면, 다른 사람은 우주공학, 정치 또는 건축학을 전공했습니다. 국적도 다양한 편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이탈리아인 50%, 외국인 50%라는 규칙을 정해놓고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이들의 인생 스토리가 팀 작업을 통해 새로운 피닌파리나의 스토리로 표출되는 것이지요."

기자는 이번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고급 가구 제조업체 중 하나인 카시나로 달려갔다. 피닌파리나에서 자동차로 3시간, 밀라노 외곽에 본사가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다리오 리네로(Dario Rinero) 사장은 대뜸 질문 하나를 던졌다.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소파가 언제 디자인된 줄 아세요?"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의 가죽 소파였다. "한 10년쯤 됐나요?"

"1950년입니다. 60년 전이죠. 카시나는 늘 세월의 법칙을 초월한 디자인을 추구해 왔습니다. 포드의 1915년 모델을 지금 보면 100년 전에 만들어진 자동차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만, 카시나가 만든 가구를 진열해 놓으면 누구도 50~60년 전에 디자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진설명)

이탈리아 디자인의 대표격인 피닌파리나의 자동차와 카시나의 가구들. 위에서부터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페라리 599’, 콘셉트카‘니도’, 카시나의‘프라이브’,‘ 지그재그’,‘ 힐 하우스.

세계적인 車디자인 '피닌파리나' 파올로 피닌파리나 회장 인터뷰
"페라리, 디자인 80년의 힘"

피닌파리나 개요

●설립연도: 1930년
●매출액(2009년): 1억8617만유로(약 2800억원)
●직원 수: 1800여명
●디자인 철학: 우아함(elegance), 본질(essentiality), 혁신(innovation)
●대표 제품: 페라리, 마세라티, 벤틀리, 토리노올림픽 성화봉, 모토로라 무전기

'이탈리아스럽다'라는 말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야기한다. 기자의 정의 역시 좀 남다를지도 모른다. '겉으론 평범하고 수수한 분위기이지만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특별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인 업체 피닌파리나(Pininfarina)의 본사도 그랬다. 페라리(Ferrari)가 잉태된 곳이란 기대와 달리 첫인상은 매우 차분했다. 외벽이 짙은 갈색으로 된 중앙디자인센터에 들어가자 내부도 검은색과 진청색 계열의 차분한 톤이었다.

 

 

피닌파리나가 창립 80주년 기념으로 디자인한‘알파 로메오’스포츠카 옆에 선 파올로 피닌파리나 회장. / 홍원상 기자
 

그러나 1층 중앙에 전시된 2009년식 '페라리 458'은 그런 분위기와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 기자에게 작은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차 한 대 가격이 약 3억7000만원이고, 2년간 주문 예약이 끝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빨간 페라리 뒤편 유리창 너머로 널찍한 연못과 잔디밭이 내다보였다. 스포츠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다 광활한 호숫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착각에 빠졌다.

파올로 피닌파리나 회장도 그랬다. 그는 디자이너 하면 떠오르는 독특한 안경이나 옷차림과는 정반대인 평범한 정장 차림이었다. 게다가 흰색 셔츠에 단정하게 맨 짙은 감색 넥타이까지…. 그러나 그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어딘가 숨겨놓았던 열정을 쏟아냈다. 질문을 하면 답을 고민하면서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기울이거나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기도 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디자인을 하라

―많은 사람을 피닌파리나에 열광케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일관성입니다. 사람들이 저희 제품을 봤을 때 로고가 없더라도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했다고 알 수 있게끔 디자인하는 것이지요. 우린 아름답긴 하지만 일관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택하지 않습니다. 피닌파리나만의 일관성이 느껴지는 아름다움만 우리는 원합니다."

―일관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저희는 '정상에 도달했다'는 생각을 버리겠다고 늘 다짐합니다. '대조(contrast)'를 이루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탈리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이미지, 창의적이면서도 상업적인 스타일, 전통적이면서도 새로운 디자인, 이런 대조적인 요소들이 균형 있게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마세라티의 버드케이지


그는 완벽한 디자인을 얻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 한 가지를 소개했다. 실물 크기의 자동차 모형을 회전판 위에 올려놓고 한없이 돌려보며 눈에 거슬리는 부분을 찾아 계속 수정하는 것이다. 그는 "회전판을 시계 방향으로 돌리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리기도 하고, 어떨 땐 자동차는 그대로 세워둔 채 내가 직접 돌아보기도 한다"면서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피닌파리나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토리노 폴리테크닉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1982년 피닌파리나에 입사했으며, 2008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한 형에 이어 회장이 됐다.

―일관성과 함께 추구하는 것은?

"혁신(innovation), 혁신, 혁신입니다. 우리는 단순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이것은 물론 열린 마음을 갖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아, 한가지 추가한다면 호기심입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두려움 없이 적극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도전 정신 같은 것 말이지요."

―최근 IT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디자인 혁신의 속도도 더욱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휴대전화를 보면 몇 달마다 새 모델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디자인과 맞지 않습니다. 저희는 기술과 디자인을 오랜 기간 연구해서 완성도가 높은 제품을 만드는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개발될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지요."

그는 "예를 하나 들겠다"더니 볼펜을 들어 종이에 자동차 앞부분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앞 유리창은 오랫동안 이렇게 중앙의 기둥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닌파리나의 창업자이신 저희 할아버지(바티스타 파리나ㆍBattista Farina)는 언젠가 자동차 앞 유리창이 곡선의 통유리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하고 디자인을 미리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디자인 작업은 기술이 개발된 뒤에 이뤄집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동차 앞유리를 통유리로 만드는) 기술이 실현되기도 전에 디자인을 미리 해 놓은 것이지요. 자동차 기술 개발에 매우 역사적인 사건이었죠."

―지금은 어떤 새로운 기술을 예측하고 준비하고 있나요?

"태양광 자동차의 디자인을 기획 중입니다. (그는 다시 볼펜을 들고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광 자동차는 지붕에 달린 집광판이 주차했을 때는 45도로 서는 것입니다. 태양광 에너지를 더 빨리 충전하는 동시에 햇빛을 막아줘 자동차 실내 온도를 쾌적하게 유지해 주죠. 앞으로 10년 안에 이런 태양광 자동차가 상용화될 것으로 보고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중앙디자인센터 건물 오른쪽에는 자동차 디자인, 왼쪽에는 산업디자인 부문이 위치하고 있다. 각각 100명과 3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직원들의 책상은 둥근 기둥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뻗어나가는 식으로 배치돼 있다. 회의가 필요할 때마다 여러 책상을 하나로 붙여 대형 테이블로 만들 수 있다.

어려울수록 '디자인'으로 돌아가라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성화봉

피닌파리나는 1930년 카로체리아'(Carrozzeriaㆍ수작업 중심의 소규모 자동차 제작사)의 하나로 출발했다. 1946년에 '치시탈리아(Cisitalia)'를 내놓은 데 이어 1952년에는 페라리의 창업자 엔초 페라리와 손잡고 '페라리 212'를 내놓았다. 이후 페라리의 여러 모델 외에 알파로메오, 피아트, 란치아, 푸조, GM과 같은 세계적 업체들과 손잡고 수많은 명차를 낳았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대우차의 레조, 라세티와 현대차의 라비타도 그 중 하나다.

1987년에는 산업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피닌파리나 엑스트라를 설립, 자동차 디자인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모토로라(무전기)와 라바짜(에스프레소 커피 머신), 3M(프로젝터), 삼성전자(컴퓨터 모니터)를 위해 디자인을 해줬다. 그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은 굉장한 자극제이고, 회사를 살찌우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올해로 피닌파리나가 80살이 됐습니다. 장수 비결이 있다면?

"80년 역사 중에 저희도 몇 차례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우리가 강조하고 회사의 모든 에너지를 쏟은 곳은 디자인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어려움이 있지만, 이번에도 역시 우리 회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 역량을 강화하는 데서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저희는 할아버지 대부터 지금까지 약 100대의 페라리 자동차를 디자인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디자인할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임합니다.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많은 대화와 토론을 합니다."

―페라리의 빨간색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인지 저는 피닌파리나의 본사 건물도 붉은색 계열이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하하하. 하지만 보시다시피 회사 내부는 짙은 파란색 계열로 꾸며져 있습니다. 회사의 심벌 마크(F)도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이뤄져 있고요. 빨간색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색깔인 것은 분명합니다. 빨간색은 페라리뿐 아니라 알파로메오 디자인의 중요한 색깔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다른 색깔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토리노 성화봉(파란색)이나 마세라티(회색)처럼 저희는 거의 모든 색깔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노란색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네요. 하하."

그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타크(Philippe Starck)의 말을 소개했다. "필립 스타크는 '당신이 선호하는 색깔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No)'고 답했습니다.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색깔이 있다면 음악을 하는 사람이 7개의 음(音) 중에 한가지 음으로만 연주하는 것과 같다'면서 말이지요. 저는 그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피닌파리나가 1960년대에 나무로 만든 차량 모형. / 홍원상 기자


―영감을 얻기 위하여 특별히 하는 일이 있다면?

"호기심, 호기심! 그리고 호기심에 대한 훈련입니다. 호기심은 주변 환경을 정밀하게 관찰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원 가꾸기도 호기심에서 비롯된 취미죠. 정원을 가꾸고 계절마다 꽃들이 피어나는 걸 보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처럼 큰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다른 경영자도 비슷하겠지만 그에게도 경쟁사의 신제품은 가장 큰 호기심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는 그 호기심을 색다른 방법으로 푼다. 그는 경쟁사가 신제품을 내놓으면 갖다 놓고 '만약 우리가 했다면 어떻게 디자인했을까' 생각하면서 분석하고 재창조해본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가구의 자존심 '카시나' 다리오 리네로 사장 인터뷰
"디자이너와 장인이 함께 명품을 만든다"


카시나 개요

●설립연도: 1927년
●매출액(2009년): 1억124만유로(약 1500억원)
●직원 수: 390여명
●디자인 철학: 연구(research), 혁신(innovation), 장인정신(craftsmanship)
●대표 제품: 수퍼레게라(Superleggera), 캡(CAB), 프라이브(PRIVE), LC4

20세기 초반 밀라노 북쪽의 작은 도시 메다(Meda)에는 뛰어난 목재 제조 기술을 수백 년째 이어온 카시나(Cassina) 가문이 있었다. 지역의 대표적 장인(匠人)으로 인정받은 이 가문은 1927년 정식으로 가구회사를 세운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적 거장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디자인을 상품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냄으로써 세계 최고급 가구 제조업체로 자리매김한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 카시나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건축가 지오 폰티(Ponti)가 1957년에 디자인한 초경량 의자 '수퍼레게라(Superleggera)', 디자이너 마리오 벨리니(Bellini)가 1977년에 디자인한 의자 '캡(CAB)을 비롯해서 30~50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제품들이 지금도 공장 곳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나온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한 개에 370만원 정도 하는 수퍼레게라 의자는 요즘도 연간 2000~3000개 팔린다.

하지만, 바뀐 것도 있다. 작은 공방은 현대식 기계를 갖춘 2층짜리 공장으로 바뀌었고, 공정 대부분이 기계화됐으며, 회사는 카시나 가문의 손을 떠났다. 5년 전 이탈리아의 다른 명품 가구업체 폴트로나 프라우 그룹(Poltrona Frau Group)에 인수된 것이다.


명품은 창의성과 장인정신의 결합

 

그러나 폴트로나 프라우 그룹 대표이자 카시나 대표인 다리오 리네로(Dario Rinero·사진) 사장은 카시나의 전통을 잇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카시나의 강점은 여러 거장과 손잡고 그들의 혼(魂)을 제품으로 만들어 온 것입니다. 한 명의 디자이너에 얽매이지 않고요. 이것은 새로운 영감을 얻고, 생각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요즘 경영계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의 원조격인 셈이다.

리네로 사장은 이탈리아의 대표적 식품업체인 바릴라에서 14년간 일했고, 코카콜라의 이탈리아 현지법인으로 옮겨 CEO를 지냈다. 그는 "명품은 거장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만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제조회사의 기술과 화학적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새로운 소파를 만들 경우 디자인적인 영감을 기술적으로 어떻게 구현할지 디자이너와 장인이 몇 달 동안 함께 고민해야 비로소 최고의 제품이 탄생하는 것이죠. 마치 남자와 여자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지는 것과 같습니다."

리네로 사장은 사례 하나를 들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타크가 소파(제품명 PRIVE)를 디자인하면서 카시나 기술진에게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한 적이 있다.

이전의 소파는 평평한 쿠션 중간중간에 바둑알 비슷한 단추를 달고, 그 단추를 위에서 아래로 잡아당기는 방식으로 볼륨감 있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방법은 기술자가 단추를 잡아당기는 강도에 따라 쿠션의 높낮이가 균일하지 않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필립 스타크는 이 문제를 풀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카시나 기술진은 오랜 연구 끝에 해결책을 찾았다. 평평한 소파의 쿠션 자체를 형틀에 찍을 때부터 울룩불룩 입체감 있게 만든다. 그리고 단추는 나중에 끼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간단한 것 같지만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발상이었다."

리네로 사장은 직원들의 창의성을 북돋우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했다. 직원이 해외 출장을 가면 가급적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미의식과 전통문화, 가치관을 체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것과 융합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새로운 도전을 통해 차별화된 능력을 키운다

카시나는 최근 호텔ㆍ사무실ㆍ박물관의 인테리어, 요트 내부 설계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활발히 넓히고 있다. 루이뷔통ㆍ카르티에ㆍ페라가모ㆍ발리의 매장과 카타르 도하의 이슬람 미술 박물관, 밀라노 증권거래소의 인테리어 디자인도 카시나 작품이다.

리네로 사장은 사업을 다각화하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첫째, 공공건물을 우리가 디자인하게 되면 방문객들이 인테리어에 매력을 느끼게 되고, 결국 자기네 주거공간에도 카시나 제품을 갖다 놓으려고 할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굉장히 다양한 기술을 개발하고 접목시켜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일을 마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런 점에서 가구 제조만을 고수하는 업체들에 비해 차별화된 능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자동차회사가 경주용 자동차를 개발해 경기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리네로 사장은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둘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한계를 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우는 것이죠. F1(포뮬러원) 경주의 한 유명한 카레이서는 '서킷을 돌 때 모든 것이 컨트롤됐다면 그것은 아마도 충분히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짝퉁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진품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

이탈리아 디자인 업계는 요즘 중국산 '짝퉁(복제)' 제품에 몸살을 앓고 있다.

―어떻게 하면 '짝퉁' 제품에 대응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들에게 진품과 복제품의 질적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차이를 보여줄 수 없다면 복제품 구입을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차이를 확실히 보여준다면 복제품이 난무하더라도 고객들은 저희 제품을 구입할 것입니다."

리네로 사장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뷰를 가졌던 전시장 한쪽에 놓인 의자로 다가갔다.

"이 의자는 르 코르뷔지에가 1928년에 디자인한 작품(제품명 LC4)입니다. 이 의자의 특징은 철제 프레임의 모서리 부분이 이음선 없이 곡선으로 부드럽게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자의 복제품들을 보면 모서리가 직선에서 곧바로 꺾이거나, 용접 처리돼 있습니다. 이처럼 저희 고객들에게 진품과 복제품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리네로 사장은 기자에게 한국어로 "생큐(Thank you)"를 어떻게 말하는지 물어봤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깜솨하니다" "캄사함니다"를 서너 차례 반복하다 마지막엔 훨씬 정확해진 발음으로 "캄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하며 악수를 건넸다.

 

밀라노·토리노(이탈리아)=홍원상 기자 wshong@chosun.com

입력 : 2010.08.28 03:00

 

 

 

[Weekly BIZ] 이탈리아 디자인의 자존심, 디자인 실명제!

 

이탈리아는 지역에 따라 특색 있는 산업들이 발달돼 있다. 롬바르디아(Rombardia) 지역만 해도 메다(Meda)의 가구, 비첸자(Vicenza)의 귀금속, 비제바노(Vigevano)의 신발, 크레모나(Cremona)의 악기, 무라노(Murano)의 유리, 부라노(Burano)의 자수 산업이 각각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다.

모두 전통적인 가내 수공업이 오랜 기간 계승돼 내려오면서 현대 산업으로 자연스럽게 발전됐다. 과거의 가내 수공업 방식은 요즘 각광 받는 다품종 소량 생산의 기반이 됐고, 그동안 축적되어온 기술적 노하우와 자부심은 장인 정신의 바탕이 됐다.

이탈리아 디자인의 자존심은 '디자인 실명제'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이탈리아에서 나오는 제품의 대부분은 디자이너의 이름을 밝힌다. 자신이 만든 제품이 사랑받은 만큼 그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신을 반영한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조명기구 제조사 중 하나인 '아르테미데(Artemide)'가'티지오(Tizio)'라는 제품을 내놓은 적이 있다. 1970년대 초 할로겐 조명기구의 등장과 함께 개발된 와이어리스 테이블형 조명기구인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렸고 지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스테디셀러이다. 그런데, 이 제품을 디자인한 리처드 사파(Richard Saper)라는 독일 디자이너는 티지오의 개발 후 10년이 훌쩍 지난 1980년에 기존 디자인의 문제점을 보완해 업그레이드된 디자인을 내놓았다. 그는 이를 통해 디자이너로서 책임을 다함과 동시에 로열티도 더 획득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명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같은 산업에서도 저마다 뚜렷한 정체성을 확보함으로써 과당 경쟁이나 중복 투자의 소지가 적다는 점이다. 가구산업을 봐도 카시나와 비엔비 이탈리아(B&B Italia), 드리아데(Driade), 카르텔(Kartell) 등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이는 각자의 미의식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아무리 대박을 터트린다 해도 남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는 일은 절대로 않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끊임없이 창조적 혁신을 추구하는 것 역시 그런 자부심의 발로임은 물론이다.

 

이찬·국민대학교 실내디자인학과 교수

입력 : 2010.08.28 03:00 / 수정 : 2010.08.28 08:10

 

출처 :  http://blog.naver.com/spp0805/120114087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