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피서법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피서법은 탁족(濯足)이다. 탁족은 발목을 흐르는 물에 담그고 열을 식히는 방법을 말한다.
이제 뜨거운 태양이 우리들을 도심으로부터 떠나버리고 싶게 만드는 여름이다. 요즘이야 자동를 비롯해 각종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해 있어서 며칠이 걸리는 피서도 시간과 주머니 사정만 넉넉하면 누구라도 갈 수 있다. 그런데 체면을 중시하고 또 교통수단이 말외에는 없던 조선시대에는 어떤 방법으로 피서를 즐겼을까?
피서(避暑)란 말 자체가 아무래도 우리네 정서와는 동떨어진 개념 같았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고는 하나 기껏 더위를 피해봤자 남산과 북한산 등 4대문 안으로 놀러가 탁족이나 유두(流頭, 머리감기), 시회(詩會)를 여는 정도일 뿐 민족 대이동을 연상시키는 현재의 피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피서(避暑)란 원래 고온건조한 날씨를 피해 가축들을 목초지로 이동시키던 중앙유목민족들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륙과 접해있는 우리나라 역시 유목민족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시대 이후부터 농경문화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피서는 가축을 위한 대규모 집단 이동이 아니라, 여름날의 폭염을 피하기 위한 휴식으로 바뀌어 갔다.
조선시대 대표적 피서법 탁족(濯足)
조선 중기 이경윤이 그린 '고사탁족도'를 보면 그 당시 선비들의 탁족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발은 온도에 민감해 찬물에 담그면 온몸이 시원해질 뿐 아니라 흐르는 물이 발바닥을 자극해 건강에 좋다고 해서 더욱 성행했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는 남산과 북한산 계곡에서의 탁족놀이를 여름철 피서법으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탁족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서울 세검정 일대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 유월조(六月條)에도“삼청동 남북 계곡에서 발씻기 놀이를 한다. (三淸洞... 南北溪澗 爲濯足之遊)”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가 당시의 풍속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아 탁족놀이가 일부 특수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던 여름 풍속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죽부인
우리나라에서만 전해오는 독특한 피서도구로 죽부인(竹夫人)을 들 수 있다.
여름철에 무덥다고 해서 알몸으로 잠을 자면 감기에 걸리는 일도 있거니와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수가 있다. 그래서 홑이불을 덮고 자게 되는데 홑것이라고 해도 그것도 몸에 걸치면 더위를 느끼게 된다.
몸에 밀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홑이불이 몸에 밀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낸 것이 죽부인인 것이다.
열 두 개의 대줄기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름 20cm, 길이 1m 남짓한 원통형 도구를 말하는데, 무더운 여름밤에 안고 자기에 알맞아서 죽부인이라고 했다. 이것을 끼고 자면 대나무의 차가운 촉감이 시원할 뿐더러, 원통 속에선 대류현상으로 바람이 솔솔 불기도 했으니 더위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더위를 즐겨라
그러나 점잖은 선비들이라면 더위를 피하기 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낙서(樂暑)를 선호했다. 우선 마음의 열을 쫓고 더위를 받아들이는 축서(逐暑)를 하거나, 선비들끼리 모여서 각각 자신이 선호하는 옛싯구나 시조를 읇조리는 시회(詩會)를 열기도 한다.
또 집안에서 가벼운 모시옷차림으로 부채를 부치면서, 삼국지나 초한전처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읽는것도 낙서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옛 선조들은 굳이 멀리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또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해도,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위를 즐기고 여유로운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