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

명절의 의미

자하연 2010. 8. 12. 22:39

1. 명절의 의미

명절은 명일(名日)이라고도 하며, 전통적으로 해마다 일정하게 정하여 이를 지키고 또한 즐기는 날을 일컫는다. 그런 까닭에 한 나라에 있어서 명절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 정서가 듬뿍 담겨 있는 소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명절에는 그때 그때에 따른 다양하고 독특한 의식이나 행사 등의 풍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이 같은 의식이나 행사를 지역사회 공동의 힘으로 치룸으로써 그 지역사회 구성원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함은 물론 단결과 화합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지역사회 발전의 밑거름의 되어 왔던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의의라 할 수 있다.
명절의 대부분은 생활 속에서 관습적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 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고 또한 이것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됨에 따라 매년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되어 행해지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관습의 대표적인 유형은 제사 의식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전형적인 농업 사회였던 우리나라의 경우 한해의 농사를 시작하면서 풍작을 기원하거나 또는 끝맺음하면서 추수에 대한 감사를 하는 형태에서 비롯된 제사 의식이 차츰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제도화되고 명절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명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명절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 있었던 명절이나 그에 따른 풍속이 의미를 잃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새로운 명절과 새로운 풍속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명절은 넓게는 한 나라의 생활 문화를 꾸밈없이 반영할 뿐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설의 의미>
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첫날로서 '세수(歲首)', 또는 '연수(年首)'라고도 하며, 새해의 아침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여 '원단(元旦)'이라고도 한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점이 되는 설날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소중한 날로서 한 해를 뜻 있게 보내기 위해 옛부터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정신과 마음가짐으로 새해 아침을 맞이하여 왔다. 이 때문에 설날은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는 날로서 여겨 왔다.

  <설빔>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미리 준비해 놓은 깨끗한 옷이나 또는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데 이때 준비한 옷을 '설빔'이라고 한다. 설빔은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그리고 각자의 형편에 맞게 누구나 준비하여 입는 것이 풍속이었다. 대체로 어른들은 특별히 다른 옷을 입지 않고 평소에 입던 옷 가운데 깨끗한 것이나 새로 지은 옷을 입었으며, 어린이들은 색동저고리를 입고 붉은 댕기를 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차례(茶禮)>
설날 아침 일찍 설빔을 갈아입고 세찬(歲饌)과 세주(歲酒)(세찬과 세주 항목 참조)를 준비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조상께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차례라고 하며, 특별히 설날 아침에 지내는 차례는 다른 제사와 구분하여 '연시제(年始祭)'라고도 한다.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풍속은 삼국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이 설치되어 있는 집은 사당의 위패를 정청에 모시고, 사당이 없는 집안은 지방을 모시고 차례를 지냈다. 차례는 주로 그 집안의 큰집(종가)에서 지내며 제사 대상은 대체로 4대조 조상까지로 한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였다.

  <세배>
설날 차례를 마치고 나면 차례에 참여했던 가족들은 그 집안의 어른에게 절을 하고 새해의 첫 인사를 드리게 되는데 이를 '세배'라고 한다. 집안 어른에 대한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내고 난 세찬과 세주로 아침 식사를 하고 곧이어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다니게 된다. 이처럼 설날 아침에 시작되는 세배는 정월 보름날까지 계속되었으며, 일가친척 어른이 먼 곳에 살고 있더라도 빠짐없이 찾아뵙고 세배를 올리는 것이 예의였다. 이 때 세배를 받은 측에서는 그 상대가 성인일 경우에는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고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과일을 내오거나 세뱃돈을 주는 풍습이 있었다.

<덕담(德談)>
세배를 드리거나 받을 때에는 새해 인사말이 함께 곁들여지는데 이를 '덕담'이라고 한다. 덕담은 새해를 맞이하여 한해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거나 또는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하는 것이 그 주된 내용으로서 다가올 한해 동안 서로의 복을 빌고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또는 "새해에는 소원성취하세요" 등의 말을 건네기도 하지만 상대편을 잘 알고 있을 때에는 그 사람의 상황에 알맞은 말을 골라 축원하기도 한다.

  <성묘>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세배를 나눈 뒤에는 조상의 묘를 찾아가 성묘를 하게 된다. 설날에 행하는 성묘는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였다는 인사를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아뢴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어른에게 설날 세배를 드리듯이 돌아가신 조상들께도 마치 살아 계실 때와 같이 인사를 드리며 그분의 덕을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세찬(歲饌)·세주(歲酒)>
세찬은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기 위하여 준비한 음식 또는 세배를 드리러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음식 등을 말한다. 세찬은 빈부의 차이, 차례를 지내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 또는 지역의 차이에 따라 마련하는 음식의 종류나 가짓수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공통적으로 준비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떡국을 들 수 있다. 멥쌀 가루를 쪄서 만든 흰 가래떡을 썰어 끓인 떡국은 차례상에도 올릴 뿐 아니랄 설날 아침에는 반드시 이 떡국을 먹는 것이 픙습이었다. 한편 세주는 설날에 마시는 술을 뜻한다. 대개는 여러 가지 한약재를 섞어 집에서 만들어 준비하였으며 이 술을 설날에 마시면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복조리>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난 직후부터 팔기 시작하며 각 가정에서는 복조리 장수의 외침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일어나 한해 동안 필요한 수의 복조리를 사게 된다. 복조리는 설날 새벽에 일찍 사면 살수록 1년 동안 복을 많이 받는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에 서로 먼저 사려고 하였으며 사들인 복조리는 한데 묶어 안방 귀퉁이의 높은 곳이나 부엌에 매달아 놓았다가 사용하였다. 이처럼 복조리를 바로 사용하지 않고 높은 곳에 매달아 두었다가 사용하는 것은 복조리로 다가오는 한해의 복을 긁어모은다는 뜻에서였다.

  <야광귀도혜(夜光鬼盜鞋)>
야광귀도혜라고 하는 것은 신발을 훔친다는 의미이다. 야광귀라고 하는 귀신은 설날 밤에 인가에 몰래 내려와 그집 사람들이 벗어놓은 신을 신어보고는 자기 발에 맞는 것을 골라 신고 간다고 하는데, 이 때 야광귀가 신고간 그 신의 임자는 한해 동안 몹시 운수가 나쁘다고 하는 속설이 있다. 이 때문에 설날 밤에는 신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 모두 자신의 신을 방이나 다락같은 장소에 숨겨놓고 불을 끄고 자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야광귀를 내쫒기 위하여 밤이 되면 대문 등에 체를 결어두기도 하였다. 그 까닭은 호기심이 많은 야광귀가 인가로 들어오다가 체를 보게 되면 체눈이 몇 개가 되는지 궁금하여 체눈을 세기 시작하는데 워낙 체눈이 촘촘하여 어디까지 세었는지를 자꾸 잊게 되고 다시 세기를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날이 밝아 결국에는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되돌아가게 된다는 뜻에서였다.

  <점복(占卜)>
다가오는 한해 동안 자신의 운명이나 미래에 있을 일들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고 앞일을 미리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점을 치게 되는데 이를 점복이라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유행하였던 점복은 오행점(五行占)으로서 이는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오행을 각각 장기알 모양의 나무에 새기고 이것을 한꺼번에 던져 그 모습을 보고 한해 동안 일어날 일들에 대해 점을 치는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서 윷을 가지고 점을 치는 점복으로서 가장 널리 유행하고 있다.

  <삼재(三災)>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맞이하게 되는 액운(厄運)이 끼어 있는 해를 뜻한다. 액운이 끼어 있는 해라는 의미에서 이를 '삼재년(三災年)'이라고도 한다. 삼재는 자신이 태어난 해에 따라 다르게 돌아오는데 9년에 한번씩 돌아오게 된다. 이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닥쳐올 수 있는 불행을 사전에 피하기 위하여 정초에 액을 쫒아 삼재를 면하기 위한 일을 하게 된다. 즉, 설날 머리가 셋 달린 매를 그려 문고리에 붙이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다가올 재앙을 면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정월 대보름

  <정월대보름이란?>
정월들어 첫 번째 맞이하게 되는 보름날로서 '상원일(上元日)'이라고도 한다. 정월 대보름은 8월 보름 즉, 추석과 더불어 중요한 명절로 꼽혀 왔으며 특히 해가 바뀌고 나서 첫 번째 맞이하는 보름이란 의미에서 다가올 한해의 기원과 관련된 다양한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부럼>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밤이나 호도, 잣, 은행 등 단단한 과실들을 이로 깨무는 풍습을 부럼이라고 하다. 이때 깨물게 되는 과실의 숫자는 대개 자신의 나이 숫자에 맞추기도 하였으나 노인의 경우 이를 상할 염려가 있으므로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과실은 단번에 깨물어 깨뜨리는 것이 좋다고 하며, 처음 깨문 것은 마당에 버리고 두 번째 것부터는 껍질을 벗겨 먹는다. 과실을 깨물 때에는 "한해 동안 모든 일이 순조롭고 부스럼이 나지 말라"는 내용의 기원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한해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고 치아도 단단해진다고 한다.

  <귀밝이 술>
정월 대보름 아침 일찍 마시는 술을 '귀밝이 술'이라고 한다. 이 때 마시는 술은 데우지 않고 차게 해서 마시는데 이 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해 동안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그런 까닭에 '귀밝이 술'은 어른들뿐 아니라 아녀자와 아이들까지도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그 술은 맑은 술이어야 더욱 귀가 밝아진다고 하여 탁주보다는 맑은 술을 마시는 것이 보통이었다.

  <오곡밥>
정월 대보름날에는 다섯 가지 이상의 곡식을 섞어 밥을 지어먹는데 이를 오곡밥이라 한다. 특히 이날은 서로 성씨가 다른 세 집 이상의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는 속설이 있어 여러 집에서 서로 오곡밥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다. 또한 평상시에는 세 끼의 식사를 하지만 이날만큼은 아홉 번을 먹어야 좋다고 한다. 이와 함께 이날은 호박고지, 무우고지, 가지나물, 버섯, 고사리 등 지난해 여름에 말려 두었던 각종 나물들을 삶아 오곡밥과 함께 먹는데 이를 '진채식(陣菜食)'이라고 한다. 진채식을 먹으면 다가오는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즐겨 먹였다.

  <더위팔기>
정월 대보름과 여름철의 더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 왔기 때문에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더위를 파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더위팔기라고 한다. 아침 일찍 해뜨기 전부터 일어나서 사람을 보거나 친구를 찾아가 급히 이름을 부른다. 상대방이 대답을 하면 재빨리 "내 더위를 사가라"고 말을 한다. 이렇게 하여 더위를 팔게 되면 더위를 판 사람은 한해 동안 더위를 타지 않게 되고, 상대방은 두 사람 몫의 더위를 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날 아침에는 친구가 부르더라도 대답 대신 "내 더위 사가라"고 응수하며, 또한 더위는 여러 사람에게 팔수록 좋다고 하여 여러 집을 찾아다니며 더위를 팔기도 한다.

  <지신밟기>
정월 대보름날 영남 지방에서는 토지신을 위로하기 위하여 집주인이 한해 동안 집안이 두루 평안하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져 나가게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행한다. 이날이 되면 마을의 청장년들이 농악대의 앞에 서서 마을 사람들의 집을 차례로 찾아가 지신을 밟아준다. 집주인은 지신밟기 일행이 찾아오면 떡과 과일, 그리고 술 등을 차린 상을 내와 일행을 대접하며, 곡물과 돈을 주어 대접하기도 한다.

  <달맞이>
정월 대보름날 저녁 가까운 동산 등에 올라 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는 것으로서 '영월(迎月)'이라고도 한다. 솟아오르는 달을 먼저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이른 저녁부터 횃불을 손에 들고 산에 올랐으며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들고 간 횃불을 땅에 꽂고 두 손을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개인의 소원뿐 아니라 대보름달을 보고 그 해의 농사를 미리 점쳐보기도 하였는데 달빛이 희면 그해에 비가 많이 내리고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며, 반대로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

  <산신제>
정월 대보름날 또는 대보름날을 전후한 가장 좋은 날을 택하여 동리의 수호신인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산신제라 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동신제(洞神祭)라고도 한다. 제사의 날짜가 정해지면 그 마을에서 부정이 없는 가장 깨끗한 사람을 골라 목욕재계를 하며 제삿날이 되면 농기를 앞세우고 농악대와 마을 주민이 산에 마련해 놓은 제단으로 올라가 농기를 세워 둔 채 밤을 기다린다. 밤이 지나 첫닭이 울 무렵 산제가 시작되는데 이 같은 산신제에 들어가는 비용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부담하며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제관뿐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가 마음을 합해 정성을 다하여 부정함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정월대보름과 관련된 놀이>
*편싸움:편싸움은 돌을 던져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돌싸움 또는 석전이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보름날을 택하여 시행하였는데 그 방법은 우선 마을과 마을 또는 한 지방을 구역별로 나누고 양편의 사이에 하천 등을 끼거나 또는 백여보의 거리를 두고 서로 돌을 던져 편싸움을 하는 것이다. 미리 양편이 정해놓은 시간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며 달아나는 편이 싸움에서 지게 된다. 편싸움은 부상자가 생길 수 있는 위험한 놀이이기는 하지만 상무정신을 길러 나갈 수 있는 남성적인 놀이이기도 하였다.

*답교놀이:대보름날 밤에 남녀노소가 모두 인근의 다리로 나와 다리를 밟는데 이를 답교놀이 또는 '다리밟기 놀이'라고 한다. 이날 자기의 나이 숫자대로 다리를 밟으면 한해 동안 다리의 병을 앓지 않고 건강을 누릴 수 있으며 액운을 면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다. 답교놀이는 매우 성행했던 놀이로서 대보름날 저녁에는 모두 다리를 밟으러 나오기 때문에 상당히 혼잡하였고 양반이나 부녀자들의 경우 이 같은 혼잡을 피하기 위해 그 하루 전이나 하루 뒤에까지 다리를 밟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삼월 삼짇날

  <삼월 삼짇날이란?>
음력 3월 3일을 삼짇날이라고 한다. 이날이 되면 추위를 피해 강남에 갔던 제비도 옛집을 찾아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그만큼 기후가 온화해지고 겨우내 움추렸던 산과 들에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무렵이면 사람들은 산과 들로 나가 봄을 즐긴다. 특히 산에 만발한 진달래꽃을 재료로 하여 만드는 꽃지짐 등은 이때 맛볼 수 있는 별미에 속한다.

  <삼짓날과 관련된 풍습>
삼짇날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윤택하고 아름다워진다고 하여 부녀자들은 이날 머리를 감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삼짇날을 전후하여 날아들기 시작하는 나비를 보고 점을 치기도 하였다. 즉, 노랑나비나 호랑나비를 먼저 보면 소원이 이루어질 좋은 징조이나 흰나비를 먼저 보게 되면 부모님이 돌아가실 좋지 않은 운세라고 믿었다.

                                    


 
한식

  <한식이란?>
절기로 따져 동지가 지난 후부터 105일째 되는 날이 한식이다. 한식날이 되면 조상의 묘를 찾아가 과일과 떡 등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내며 겨울을 지나는 동안 조상의 묘소가 손상을 입은 곳이 없는가를 살펴보고 떼(잔디)를 다시 입히거나 묘소 부근에 식목을 하기도 한다.

  <한식의 유래와 풍습>
한식날이 되면 더운밥을 먹지 않고 찬밥을 먹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중국 진(晉)나라의 충신이었던 개자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간신의 모략에 휘말려 면산이라는 곳에 숨어살게 되었다. 이때 진나라의 왕이 개자추의 충성심을 알고 면산으로 가서 그를 찾았으나 나오지 않자 개자추를 나오게 할 생각으로 면산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서 숨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그의 혼령을 위로하는 뜻에서 불을 쓰지 않고 찬밥을 먹는 풍속이 생겨났다고 한다.
한식날이 되면 농가에서는 나무를 심거나 채소 씨앗을 뿌려 새해 농사지을 채비를 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날 천둥이 치면 흉년이 들 징조일 뿐 아니라 나라에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매우 꺼려하였다.

                                    


 
초파일

  <초파일의 유래와 의미>
4월 8일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며 4월의 첫번째 8일이라는 의미에서 초파일이라고 불린다. 이날은 다른 명절들과는 달리 불교의 명절로서 종교적 색채가 짙은 날이라 할 수 있다. 초파일은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목욕을 하듯이 부처님의 은혜를 온 몸에 두루 입는다는 것으로 이날 불교신자들은 절을 찾아가 재를 올리고 축원을 드린다.

  <연등놀이>
초파일 저녁이 되면 연등놀이를 하는데 이 풍속은 신라의 팔관회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 후기에 들어와 4월 초파일의 풍습으로 정착되었다. 가정집에서는 초파일이 되면 가족의 숫자만큼 등을 만들고 그 등마다 각자의 이름을 적어 넣고 불을 밝혀 소원 성취를 빌었다. 등은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의 모양을 본떠 만들기도 하였고 그밖에도 과일이나 꽃, 물고기나 기타 여러 가지 동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으며 색채도 형형색색으로 다채로웠다.

  <초파일과 관련된 풍습>
4월 초파일에는 자연현상을 보고 그 해의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하였는데 이날 바람이 잔잔하면 그 해의 농사가 잘 되어 풍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 또한 질병에 대한 예방책으로 초파일이 되면 머리카락을 자르는데 그 이유는 이날 머리카락을 자르면 머리카락의 색이 변하지 않고 검고 윤택해지며 수명도 길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한편 4월에 나오는 햇보리를 그을려 밤이슬을 맞혔다가 먹으면 허리 아픈데 약이 되고 한해 동안 병 없이 지낸다고 믿었다.

                                    


 
단오

  <단오란?>
음력 5월 5일을 단오라 한다. 단오라는 명칭 이외에도 수리, 천중절, 중오절, 수릿날 등의 다양한 명칭이 함께 사용되는데 단오를 수리 또는 수릿날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까닭은 이날 만들어 먹는 떡을 수레바퀴 모양처럼 둥글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떠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단오는 계절적으로 볼 때 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문턱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여름철은 더위와 질병이 번지기 쉬운 계절이므로 이를 피하고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한 바램들이 단오와 관련된 다양한 풍습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

  <단오와 관련된 생활풍습>
단오 하루 전인 5월 4일 저녁에 큰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두었다가 단오날 오시 즉,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목욕을 하면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낼 수 있다고 하는 속설이 있다. 또한 부녀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밭에 나가 상치를 뜯어 그 잎사귀에 묻어있는 이슬로 아이들의 얼굴을 닦아주기도 한다. 이는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고 얼굴에 땀띠나 버짐, 부스럼 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단오와 관련되어 가장 널리 행해진 풍습으로는 창포로 머리를 감는 것인데, 단오날 창포와 약쑥을 함께 삶아 그 물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윤기 있게 자라고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창포물로 머리를 감았다고 전해진다.

  <단오부채(端午扇)>
단오를 전후해서는 여름 더위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므로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부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런 까닭에 단오날이 되면 예전에는 임금이 직접 신하들이나 시종들에게 부채를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단오부채 즉, '단오선'이라고 하였다. 이때 하사했던 부채는 대체로 접는 방식으로 된 것과 원형으로 퍼져있는 것이 있었으며 그 모양도 매우 다양하였고 장신구로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맵시 있는 것이 많았다.

  <익모초 따기>
단오에는 정오 무렵이 되면 익모초와 쑥을 뜯는 풍속이 있었다. 이는 익모초와 쑥을 뜯어 잘 말린 뒤 약재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는데 단오날에 뜯는 이유는 이 무렵의 익모초와 쑥이 특히 약효가 좋다고 하기 때문이었다. 익모초는 산모의 몸에 효험이 있고 여름에 입맛이 없을 때 즙을 내어 마시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농촌에서는 단오날 이른 아침에 쑥을 베어다가 다발로 묶어 문 옆에 세워두기도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다가올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속설이 있다.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옛 선조들은 남녀가 만나 짝을 지어야 하지만 아기를 갖게 되고 자손을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짝을 지어주어야 열매를 많이 맺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단오날 정오 무렵에 대추나무의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주고 도끼로 잔가지들을 잘라주는 일을 하였는데 이를 두고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하였다. 이렇게 하면 대추나무를 시집보낸 것이 되어 대추열매가 풍성하게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풍습은 최근 들어 현대과학에 의해 그 실제적인 효과가 증명된 바 있다.

  <단오와 관련된 전통놀이>
*그네뛰기:단오와 관련된 대표적인 여성 놀이로 꼽을 수 있다. 짚으로 굵고 단단하게 꼰 동아줄이나  밧줄을 곧게 뻗은 큰 나뭇가지나 기둥 위에 가로로 댄 나무의 양끝을 단단히 동여매고 그 아래 끝에 그네를 매어 단다. 부녀자들의 외출이 어려웠던 옛날에도 단옷날만큼은 부녀자들끼리 모여 그네를 뛰며 즐기는 것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전통 사회에서 부녀자들만이 한껏 즐길 수 있었던 몇 가지 안 되는 놀이였다. 그네뛰기는 오늘날에도 씨름과 함께 널리 행해지는 놀이라 할 수 있다.

*씨름:그네뛰기와 함께 단오날에 가장 널리 행해졌던 남자의 놀이로 들 수 있는 것이 씨름이다. 씨름의 역사는 아주 오랜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 한민족의 독특한 운동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씨름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허리를 굽힌 채 상대방의 샅바를 잡고 심판의 신호에 따라 힘과 기술로서 상대방을 먼저 쓰러뜨리는 놀이이며 이 때 먼저 땅에 쓰러지거나 손이 닿는 사람이 지게 된다.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은 장군이라 불러주었으며 대개의 경우에는 상품으로 황소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씨름은 우리의 중요한 민속놀이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

                                    


 
유두(流頭)

  <유두란?>
유두는 음력 6월 보름으로서 그 명칭은 '동유두목욕(東流頭沐浴)'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동쪽의 흐르는 물가에 가서 머리를 감는다'라고 하는 의미인데 그 방향을 동쪽으로 한 것은 동방에는 맑은 기운과 함께 '양(陽)'의 기운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깃들어있던 더러움을 떨어버린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유두날이 되면 선비들은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물가로 나아가 하루를 즐겼으며, 여염집 부녀자들은 흰 포장으로 주위를 가린 채 머리를 감으며 물맞이를 하였다.

  <유두천신(流頭薦新)>
유두를 전후해서는 참외나 수박 등 여름 과일이 등장하기 시작하며, 햇밀이 생산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유두날 아침에 햇밀가루로 국수와 떡을 만들고 새로 딴 참외와 수박 등을 종묘(宗廟)에 올리는 것을 유두천신이라 하였다. 이는 새로 생산한 과일이나 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올려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우리의 전통적인 효도사상에서 비롯된 풍습이라 할 수 있다.

  <유두면(流頭麵)>
유두날에 먹는 대표적인 음식으로서 이 무렵에 생산된 햇밀가루를 사용하여 만든 국수이다. 유두날에 이 국수를 먹으면 수명이 길어지고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 모두들 즐겨 먹었다.

  <건단(乾團) · 수단(水團)>
유두면과 함께 유두날에 만들어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 건단과 수단이다. 수단은 찹쌀가루를 쪄서 떡을 만들고는 이것을 다시 손으로 잘 비벼 구슬모양을 만든 뒤 차가운 물에 넣고 꿀을 섞어서 먹는 음식이다. 이때 구슬모양의 떡을 물에 넣지 않고 그대로 먹기도 하였는데 이를 건단이라고 하였다.

  <유두와 농사 점보기>
유두날 무렵해서는 들녘에서 한창 벼가 익어갈 때이므로 이날의 자연현상을 보고 앞으로 남은 추수까지의 농사를 점치기도 하였다. 즉, 유두날 아침 일찍 천둥소리를 듣게 되면 일찍 거둬들이는 곡식들이 잘 되고, 천둥이 늦게 울면 계절적으로 늦게 수확하는 곡식들이 잘 된다고 믿었다. 만일 이날 천둥소리가 나지 않으면 한해 농사가 잘 되지 않을 것이라 하여 염려하였으며, 비가 오면 농사가 잘 될 징조라 하여 기뻐하였다.

  <유두와 관련된 생활풍습>
유두날에는 맑은 개울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닦는 것 이외에도 액을 쫓아내기 위한 풍습들이 있었다. 즉, 이날이 되면 잡귀신의 출입을 막고 액을 쫓기 위하여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처럼 만들고는 이를 다시 색으로 물들인 다음 3개씩 포개어 실로 꿰어 허리에 차고 다니거나 대문 위에 걸어두었다. 이 같은 풍습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며 함께 수반되는 각종 여름철 질병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삼복(三伏)

  <삼복이란?>
삼복은 초복과 중복 그리고 말복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초복은 하지로부터 세 번째 경일(庚日), 중복은 네 번째 경일, 그리고 말복은 입추가 지난 뒤 첫 번째 돌아오는 경일에 해당한다. 이때는 시기적으로 한해 중 가장 더위가 극에 달할 때이므로 땀을 많이 흘리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등 건강을 해치기가 쉬운 때이다. 따라서 삼복과 관련해서는 더위를 피하고 원기를 회복하기 위한 독특하고 다양한 풍습이 생겨나 널리 행해졌다.

  <계삼탕>
요즈음에 와서 삼계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계삼탕은 복중에 널리 애용되던 대표적인 음식으로서 햇병아리를 잡아 인삼과 찹쌀, 대추 등을 넣고 푹 고은 것이다. 복중에 땀을 많이 흘려 원기가 없어질 때 이 계삼탕을 많이 먹으면 원기가 회복되고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하여 가정에서 널리 애용하였다. 또한 계삼탕과 함께 남자 어른들이 즐기던 복날 음식으로는 구탕이 있었다. 구탕은 개고기를 삶아 만든 음식으로서 이것을 먹으면 원기를 회복하고 질병을 예방한다는 속설이 있어 이 또한 널리 애용되었다.

  <약수마시기>
삼복중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약수를 즐겨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무렵 해서는 산간의 약수터에는 사방에서 약수를 마시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붐비게 마련이었으며 이름난 약수터는 시장처럼 사람들이 북적였다. 물론 약수마다 그 속에 함유되어 있는 성분에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옛부터 약수는 신경쇠약이나 소화불량 등의 질병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함경남도의 석왕사 약수나 삼방약수 등이 유명하였다.

  <삼복과 관련된 생활풍습>
복날이 되면 선비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계곡 등을 찾아가 더위를 피하여 하루를 보냈으니 이것이 곧 더위를 피한다는 의미의 피서였다. 또한 예전에는 이 무렵이 되면 임금께서 높은 관직에 있는 신하들에게 빙표(氷表)를 하사하여 얼음을 저장해 둔 창고에서 정해진 양만큼의 얼음을 받아가 쓰도록 하였다. 한편, 복날에는 아이들이 목욕하는 것을 꺼려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날 목욕을 하게 되면 몸에 살이 오르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칠월칠석

  <칠석의 유래>
음력 7월 7일을 칠석이라 하며 이 날에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의 전설이 전해진다. 하늘나라의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가 결혼하였으나 너무 금실(琴瑟)이 좋았던 그들은 늘 함께 있고 싶은 나머지 일을 게을리 하게 되었고 이에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살게 되었다. 그 뒤 이들 부부는 서로를 그리워하면서도 은하수를 건너지 못하여 애태우며 지내야만 하였다. 이 같은 사연을 알게 된 까마귀와 까치가 해마다 칠석날에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이 다리가 오작교(烏鵲橋)이며 칠석날이 되면 견우와 직녀가 이 오작교를 건너 서로 만나 회포를 풀고 다시 헤어진다. 이 때문에 칠석날 저녁에 비가 내리면 견우와 직녀가 만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하였으며, 다음날 아침에 비가 내리면 서로 헤어지며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라고 하였다.

  <칠석과 관련된 생활풍습>
해마다 칠석날이 되면 서당에서는 학생들에게 견우와 직녀를 주제로 하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처녀들은 직녀성을 바라보며 바느질 솜씨가 늘도록 해주기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이 때를 전후해서는 옷과 책 등을 햇볕에 말리는 풍습이 있었다. 칠석날 무렵에는 이미 장마가 그치는 때이므로 장마철 동안 옷과 책에 베어있던 습기를 잘 말려 좀이 슬거나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백종일(百種日)

  <백종일이란?>
백종일은 음력 7월 15일이며, 정월 대보름을 상원일이라고 하는데 비해 이날 즉, 7월 보름날은 중원일이라고 한다. 원래 백종이라는 말은 이 무렵에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기 때문에 제물을 백가지를 차려놓는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백종일은 그 명칭이 다양하게 불리워져 백중절(百中節) 또는 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하였으며, 농부들과 머슴들의 명절이라는 뜻에서 머슴날이라고도 하였다.

  <백중장(百中場)>
백종일을 전후하여 열리는 시장을 백중장이라 하였으며, 여기에서는 씨름판을 비롯하여 갖가지 놀이가 벌어지며 사람들이 몰려와 많은 혼잡을 이룬다. 특히 백중장이 서면 주인들은 머슴들에게 새옷 한 벌과 시장에 나가서 먹고 즐길 돈을 주어 하루 일을 쉬도록 해 주었는데 이 돈을 백중돈이라 하였다.

  <호미씻이>
호미씻이는 농부를 위한 일종의 위로연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자어로는 세조연이라고도 하였다. 백중절 무렵이 되면 여름 농사는 거의 끝나고 추수를 할 때까지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된다. 특히 이 때가 되면 논이나 밭을 매는데 사용하던 호미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므로 호미를 잘 씻어 보관하는데 이 날은 집집마다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산과 계곡을 찾아 농악과 함께 하루를 즐긴다.

  <백종일과 관련된 생활풍습>
백종일에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히 남자들이 들에 나가 일하는 것을 금기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산신(山神)이 한창 곡식을 여물게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들에 나가 일을 하면 산신이 하고 있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하는 속설 때문이었다. 부녀자들도 마찬가지로 집안 일을 삼가며 하루를 집에서 쉬며 보내는 것 또한 백종일에 볼 수 있는 풍습이었다.

                                    


 
추석

  <추석이란?>
추석은 음력 8월 대보름으로서 가배일(嘉俳日), 중추절, 가위, 한가위 등으로도 불리워지는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명절 가운데 하나이다. 한가위라는 말은 이미 신라 시대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우리 나라 고유의 명절이다. 추석 무렵이 되면 곡식이 무르익고 추수가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햇곡식과 햇과일, 그리고 송편 등으로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놓고 먹으며 이웃들과 즐겼다.

  <차례와 성묘>
추석에는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성묘를 다닌다. 전통 사회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와 한식날, 추석, 동짓날 등 4차례에 걸쳐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차례와 성묘를 겸하게 되는 명절이 바로 추석이었다. 추석날 아침에는 모두 일찍 일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햇과일과 햇곡식으로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정성껏 차례를 지낸다. 차례가 끝나고 나면 제사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를 한다. 이 때에는 가족 모두가 함께 여름 동안 묘소 주위에 자라난 잡초를 베어내고 단장을 하게 되는데 이를 벌초라고 한다.

  <추석과 관련된 생활풍습>
*추석음식:추석은 시기적으로 햇곡식과 햇과일이 수확될 무렵이므로 그 어느 명절보다도 푸짐하고 다양한 음식이 준비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송편을 들 수 있다. 송편은 햅쌀을 갈아 반죽을 한 뒤 반원형의 모양을 잡고 그 속에 햇콩이나 참깨, 밤 등을 넣고 쪄서 만든다. 이 밖에도 역시 햅쌀로 술을 빚어 차례상에 쓰거나 손님을 맞이할 때 사용하였으며, 토란 등을 사용하여 토란단자를 만들어 먹거나 토란국을 끓이기도 하였다.

*반보기:반보기는 주로 부녀자들 사이에서 추석 무렵에 행해지던 풍습이다. 이는 부녀자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전통사회에서 오랜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친척간이나 며느리와 친정어머니 사이에서 서로 만나보고자 할 때 행해지던 생활풍습이었다. 서로 만나보고자 할 때에는 미리 연락을 보내어 날짜를 정하고 서로 사는 곳에서 중간쯤 되는 곳에 장소를 정하여 서로 음식 등을 준비해가지고 가서 만났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서로가 집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였으므로 실제로는 한나절밖에는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온전히 하루를 함께 하지 못하고 한나절만을 같이 지낼 수 있다고 하여 반보기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추석과 관련된 전통놀이>
*거북놀이:거북놀이는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 지방에서 행해지던 놀이로서 수신(水神)을 상징하는 거북이를 즐겁게 해줌으로써 비를 많이 내려 농사가 잘 되게 해 줄 것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 놀이이다. 거북놀이는 두 사람이 나란히 엎드리고 그 위에 거적을 덮어씌운 뒤 그 거적을 짚으로 거북의 껍질모양으로 엮어 거북을 만든다. 그리고는 이 거북의 앞을 질아비가 선도하며 그 뒤에는 농악대가 흥겹게 농악을 울리며 함께 따른다. 거북이는 동네의 집집을 돌아다니며 농악과 함께 춤을 추며 이 때 그 집에서는 미리 준비한 음식을 내놓아 이들을 대접한다.

*강강수월래:강강수월래 놀이는 주로 전라남도의 해안지방에서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널리 행해졌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즉,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 수군과 맞서 싸울 때 그 부근의 부녀자들 수십 명이 산에 올라 불을 피워놓고 우리 수군을 응원하기 위해 원을 그리고 돌며 강강수월래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강강수월래 놀이는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여성적인 놀이로서 대개는 2∼30명 많을 때에는 40여명이 한데 모여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커다란 원을 만들어 돌며 춤을 추는 것이다.

                                    


 
중양절(重陽節)

  <중양절이란?>
음력 9월 9일을 중양절이라고 하며 다른 명칭으로는 중구절(重九節)이라고도 한다. '중양'이라고 하는 말은 '양(陽)'이 두 번 겹쳤다는 뜻으로서 한햇동안 이같이 '양'이 두 번 겹친 날은 1월 1일을 비롯하여 여러 날이 있지만 유독 9월 9일만을 중양절이라 하여 명절로 삼게 된 까닭은 '9'라고 하는 숫자가 '양' 가운데 가장 큰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절적으로 가을의 기운이 완연한 시기에 맞이하게 되는 명절인 중양절은 중국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나 거의 대부분의 북방 민족이 함께 즐기는 명절이라고 할 수 있다.

  <중양절과 관련된 생활풍습>
중양절 무렵이면 산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들에는 국화꽃이 만발하게 된다. 따라서 중양절과 관련된 생활풍습으로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단풍놀이를 들 수 있다. 중양절이 되면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교외로 나가거나 가까운 산에 올라 단풍을 즐기며 하루를 보냈다. 또한 중양절에는 계절의 꽃인 국화와 관련된 음식이나 술을 즐겼다. 국화의 꽃잎을 따서 찹쌀가루와 반죽하여 부침을 해먹었는데 이를 국화전이라고 하였으며, 술에 국화를 넣어 국화주를 빚기도 하였다.

                                    


 
납일(臘日)

  <납일이란?>
동짓날로부터 따져 3번째 미일(未日)에 해당하는 날을 납일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납일에는 종묘와 사직에 대대적인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납향(臘享)이라고 하였다. 이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 해의 농사와 한해 동안 있었던 중대사를 조상에게 아뢴다는 의미이다.

  <납일과 관련된 생활풍습>
납일에 참새를 잡아먹으면 영양 보충이 되고 특히 어린이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그물이나 새총으로 참새를 잡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또한 납일에 내린 눈은 약이 된다고 하여 쌓인 눈 가운데 깨끗한 부분을 떠서 병에 넣어두었다가 김치 등에 넣기도 하였다. 특히 이날 약을 만들면 1년 내내 약효가 변하지 않는다고 하여 옛날에는 왕실에 소속된 내의원에서는 여러 가지 환약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납일에 지은 약이라는 의미에서 '납약(臘藥)'이라고 하였다.

                                    


 
제석(除夕)

  <제석이란?>
음력 섣달 그믐날을 제석이라 하며 한해의 마지막 날을 뜻한다. 제석은 한해를 돌아보며 마무리하는 의미깊은 날인 동시에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지난 한해 동안 있었던 거래를 마무리짓기 위하여 노력하며, 빚이 있는 사람은 해를 넘기지 않고 청산하는 것이 관례였다. 만일 이날 자정이 넘도록 빚을 받지 못하면 다가오는 새해의 정월 보름까지 빚 독촉을 하지 않는 것 또한 특이한 풍습이었다 할 수 있다. 동시에 각 가정에서는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밤늦도록 떡가래를 만드는 등 세찬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며, 여자들이 세찬 준비를 하는 동안 남자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며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하였다.

  <제석과 관련된 생활풍습>
제석은 '작은 설'이라고도 하여 묵은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주위의 어른을 찾아뵙고 한해가 무사히 다 지나갔다는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날이 되면 민간에서는 세의(歲儀)라고 하여 가까운 어른이나 친척 또는 스승에게 정성을 담은 선물을 보내드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같은 풍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제석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수세(守歲)의 풍속을 들 수 있다. 이는 말 그대로 한해가 지나가는 것을 지킨다는 의미인데 그믐날 밤이 되면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히고 모두가 밤을 새우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 불을 밝히는 것은 잡귀의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날 밤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믐날 밤에는 모두 잠을 자지 않으려 애를 쓰며 잠을 쫓기 위해 윷놀이 등 흥미있는 놀이를 하며 밤을 새고 새해 아침을 맞이하였다.

  <제석과 관련된 전통놀이>
*윷놀이:윷놀이는 제석무렵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정월 초에까지 민간에서 가장 성행하던 전통놀이이다. 윷은 싸리나무 등을 잘라 4쪽으로 쪼개 만들며 이것을 던져 그 흩어진 모양을 보고 엎어지거나 젖혀진 상태에 따라 말을 움직이는 놀이이다. 윷놀이의 말판은 모두 29개의 점을 찍어 만들며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교대하며 윷을 던지고는 각각 4개씩의 말을 움직여 가며 놀이를 진행한다. 이때 윷을 던진 결과에 맞춰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말을 사용하는데 있어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으므로 놀이의 흥미를 더하게 된다.

*널뛰기:윷놀이와 함께 제석 무렵부터 정초까지 가장 널리 성행했던 전통놀이로서 윷놀이가 남녀의 구분없이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였던 반면에 널뛰기는 주로 여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대표적인 놀이였다. 널뛰기는 짚단을 원통형으로 감아말아 놓고 그 위에 길다란 널빤지를 올려놓은 뒤 널빤지의 양쪽 끝에 각각 한 사람씩 마주보고 올라서서 교대로 뛰어오르기를 반복한다. 이 놀이는 힘이 빠지거나 또는 상대방이 발을 헛딛게 될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운동을 겸할 수 있는 좋은 전통놀이로서 오늘날에까지도 계승되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출처 : http://blog.naver.com/cbcykim/20099937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