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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성장 신화 이끈 `5대 정신`

자하연 2010. 8. 2. 23:54
출처 사랑은 가슴속 깊은 곳에 | 한우리
원문 http://blog.naver.com/spp0805/12011197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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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체인지 코리아] "하면된다" 50년 초고속 압축성장…한국식 산업혁명 일궈

 

2부. 5대 정신이 한국을 이끌었다 ① 창조의 정신…無에서 有로
"수출만이 살길" 외치며 정부 주도 계획경제 추진 국민 적극 동참도 '한몫'
재벌 특혜등 부작용 불구 세계사 유례없는 성장으로 글로벌 리더 대열에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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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년 동안 우리나라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고속성장을 이룩한 지난 1960~1970년대는 실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초만 해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나 지금은 경제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다. 1962년 8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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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2007년 2만달러를 넘어서며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특히 2차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 가운데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며 최근에는 문화ㆍ스포츠ㆍ기술 분야에서도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도 경제개발협력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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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오는 11월에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이끌어나갈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일 만큼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김인준 전 한국경제학회장은 "서구사회가 200년 넘게 걸린 경제발전과 근대화를 우리나라는 50년이라는 단기간에 이루는 압축성장을 했다"면서 "이 과정에 서민들의 희생과 계층 간 소득불균형 심화, 재벌 특혜라는 부작용도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고속성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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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한국식 산업혁명 일궈=1963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식 산업혁명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식민지 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피폐해진 국토를 회복하고 미국 등 선진국의 원조가 없는 경제자립을 목표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박정희 정권은 수출 제일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1964년 정부가 1억달러 수출 목표를 세웠을 때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수출만이 살길이다. 하면 된다'는 구호를 내걸고 관료들과 기업, 국민들을 설득해 결국 1억달러 수출을 달성해냈다.

이어 1967년 3억달러, 1970년 10억달러 수출이라는 고속성장을 통해 한국식 산업혁명의 성공을 이뤄내기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을 보좌한 오원철 전 제2경제수석은 "박 대통령이 늘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밀어붙여라'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말을 강조했다"면서 "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독려에 힘입어 당시 연간 40% 이상의 수출 증가율을 기록했다"고 회상했다.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국민들의 아픔도=1960~1970년대 한국경제의 고속성장 이면에는 아픈 얘기들도 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세웠으나 이를 추진할 자금이 없어 미국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무상원조를 받는 최빈국에 차관을 줄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일본도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 협정을 맺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결국 정부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낸 독일을 배우겠다는 명분 아래 1964년 박 전 대통령이 국빈방문 자격으로 서독을 방문했고 1,350만달러의 재정차관과 2,625만달러의 상업차관을 공여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광부들과 간호원들이 독일로 파견돼 외화벌이에 나서야 하는 아픔도 함께 겪어야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참석한 해외동포 환영만찬은 그야말로 가난한 백성과 가엾은 대통령이 함께한 눈물의 바다였다고 한다. 1965년에는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받은 식민통치에 대한 보상 자금을 농∙어업 분야에 사용하려던 계획을 바꿔 포항제철소(현 포스코) 건립에 투자하기도 했다.

아울러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기에 가능했다. 1973년 석유위기로 한국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을 때 2,000여명의 17~18세 청소년 기능사들이 중동으로 파견됐다. 이듬해부터는 중동건설 현장으로 기술인력이 대거 파견돼 외화벌이에 나서기도 했다. 윤영각 삼정KPMG 대표는 "1960~1970년대 산업화 시기는 정부 주도하에 경제개발이 이뤄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동참과 희생이 뒤따랐다"고 말했다.

◇경제개발 위해 정부 주도형 계획경제=한국경제가 반세기 만에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룬 데는 무엇보다 정부 주도로 계획된 시장경제가 도입됐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화학공업 건설 당시에는 선진국처럼 공업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 1970년 10억달러 수출을 달성한 후 1977년 100억달러 수출목표 달성을 위한 후속조치로 이뤄졌다는 점만 봐도 정부 주도적 경제개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지금 우리의 주력산업인 조선과 자동차ㆍ석유화학ㆍ철강 등의 산업 육성계획도 동시에 병행했고 1977년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71~1977년 연간 수출 증가율은 39.8%로 국민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 육성과 함께 국민의 과학화를 선언했다. 공업구조의 구도화를 통한 선진공업국 건설과 함께 국력을 증대하기 위해 자주국방에도 나섰다. 정부가 방위산업 육성에까지 나서게 된 것. 국산무기 화력시범대회를 개최하고 한국형 전차 개발을 위한 탱크업체 지정을 비롯해 각종 소총과 무기류, 심지어 국산 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원장은 "정부 주도형 계획경제가 재벌특혜라는 병폐를 낳았지만 경제발전 고비마다 기업과 국민에게 창조적 정신을 독려하며 고도성장을 주도하는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눈부신 성장 중심엔 경제기획원 있었다                                                                        

 

61년 출범 경제정책 총괄 두자릿수 성장률 등 주도

94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재무부와 통합 역사 속으로

 

지난 1960~1970년대 우리 경제를 고속 성장시킨 주역을 꼽자면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경제기획원을 들 수 있다. 한국경제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는 과정에는 늘 경제기획원이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기획원이 출범한 1960년 당시의 경제상황을 살펴보면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세계 125개국 중 101위에 불과했다. 또 수출은 3,300만달러, 수입은 3억4,000만달러, 외환보유액 1억6,000만달러로 상당히 열악한 실정이었다. 북한과 경제력 격차도 컸다.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5년도 당시 남한의 1인당 국민 소득은 105달러로 북한의 162달러의 60% 수준에 불과했다.

군사정권으로서는 집권초기 국가 재건을 위한 경제개발이 통치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공업화를 통한 경제개발 선택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경제기획원은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출범 당시 기획ㆍ예산ㆍ외자조달 기능이라는 3대 핵심 수단을 갖고 각 부처의 정책 수립과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여기에 경제기획원 수장이 내각의 두 번째 서열로 올라서면서 명실상부한 국가경제정책 총괄부서로의 위치를 점하게 됐다.

경제기획원의 첫 번째 임무는 경제 부처에 대한 총괄∙조정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장치인 경제장관회의 개최였다. 월례 경제동향 보고회와 수출 진흥 확대회의를 개최해 총리 이하 전 각료, 중앙은행 총재,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통령 특별보좌관, 여당 정책위원장, 관련 상임위원장이 배석한 가운데 대통령에게 각종 정책을 보고했다. 당시에는 경제기획원 청사에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 회의를 주재하고 점심도 함께했기 때문에 잔칫날과 같은 분위기였다. 어려운 면도 있었지만 이 같은 행사를 통해 경제기획원의 위상이 높아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기획원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이처럼 경제기획원의 주도적 역할하에 한국경제는 1960년대 두자릿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1970년대에는 두자릿수에 가까운 성장과 20%대의 수출증가율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고속성장을 이어갔다. 경제기획원의 중요성은 전두환∙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져 1988년에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이뤄내는 데도 일조했다.

그러나 1961년 발족한 이래 경제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해오던 경제기획원은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1994년 재무부와 통합돼 재정경제원으로 바뀌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경제기획원의 간판을 내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명분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독재정권의 정부 주도적 경제개발 메커니즘 종식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 고도성장과 경제발전에 따른 경제기획업무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1,1970년 7월 7일 대전인터체인지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테이프를 끊고 있다. /서울경제DB

2,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화학공업 추진기획단에 하사한 휘호.

 

이현호기자 hhlee@sed.co.kr

입력시간 : 2010/07/12 16:41:53

 

 

[그레이트 체인지 코리아] 창조적 파괴·魂을 담은 경영으로 '한국경제 전설' 만들어

 

2부. 고성장 신화 이끈 '5대 정신' ② 기업가 정신…영혼으로 일하다
故 이병철·정주영회장 등 특유의 신념·통찰력으로
70년대 변화의 시대 주도 '한국 기업가 정신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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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기업가 정신이 가장 빛을 발했던 '기업가 정신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정 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은 그야말로 혼(魂)을 담은 경영을 통해 한국경제의 '전설'을 만들었다. 무모할 정도의 위험을 온 몸으로 떠안으면서도 창조적 파괴에 나선 이들은 한국형 기업가 정신의 표상이기도 했다. 현재 한국경제 성장의 역사는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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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던 기업인들의 삶과 궤적을 같이하고 있다.

◇영웅이 신화를 만들다=정 회장은 1970년대 초반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선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그는 허허벌판인 울산 백사장 사진 한 장과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영국의 바클레이스은행에서 조선소 건립자금에 대한 차관을 약속 받았다. 또 그리스 리바노스사로부터 조선소도 없는 상태에서 26만톤급 초대형 원유운반선 2척을 14억원에 수주했다. 그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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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로 한국경제 성장의 대표적인 '신화' 가운데 하나다.

이 회장은 1970년대 초 전자산업에 진출했다. 당시 기존 업체들은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나서 삼성의 전자사업 진출저지운동을 벌였다. "삼성이 전자산업에 진출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망한다"는 얘기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전자산업에 진출했다. 삼성전자공업은 창립 9년 만인 1978년 흑백TV 수상기를 200만대 생산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 회장은 또 1977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삼성의 미래기반을 구축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회장은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갖고 전자산업과 반도체 부문 진출을 밀어붙였다. 만약 그의 도전이 없었다면 현재 글로벌 무대에서 TV와 반도체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삼성전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박 회장은 1970년대 초 포항제철소 건설이라는 대역사를 일궈냈다. 박 회장이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던 당시 세계은행은 "한국의 제철공장은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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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외환비용에 비춰 경제성이 의심되므로 건설을 연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능력도 없는 한국이 제철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조롱한 것이다. 하지만 박 회장은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 발전 없이는 국가발전도 없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으로 일관제철소 건설에 매달렸다. 박 회장은 대일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사용하자고 제안해 자금을 마련했다. 박 회장은 이후 건설과정에서 '조상의 핏값이 들어간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오른쪽에 있는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는 '우향우 정신'을 강조하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1973년 6월9일 마침내 역사적인 철 출선식 때 뿜어져 나온 쇳물에는 박 회장과 포철인들의 땀과 피가 그대로 녹아 있었다.

◇경영 마에스트로들의 마법이 시작되다=1970년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은 놀라운 경영능력으로 그룹의 성장기반을 구축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뛰어난 통찰력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이뤄낸 성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구 회장은 1970년 1월9일 구인회 창업회장에 이어 LG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구 회장은 취임 직후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쌍두마차로 유통ㆍ증권ㆍ보험 등 금융ㆍ서비스 산업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며 LG그룹의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구 회장은 또 이 시기에 연구개발(R&D)과 과감한 투자로 현재 LG의 기틀을 마련했다. 금성사중앙연구소와 럭키중앙연구소 등이 모두 1970년대에 설립됐다.

김 회장은 1978년 대우실업을 창업해 4년 만에 종합상사 업계 1위로 끌어올렸다. 대우실업은 1982년 수출의 날 6억불 탑을 받으며 국내 13개 종합상사 중 선두에 올랐다. 1978년 대우의 총 수출 대상국가는 106개국이었으며 상품은 1,437종에 달했다. 또 전세계 31개국 37개소의 해외지사에 160여명의 인력을 파견했다. 김 회장은 1978년에만도 총 48개국에서 94일간이나 체류하며 공격적인 시장개척에 나섰다. 또 1970년대에 고려피혁ㆍ동국정밀ㆍ동양증권ㆍ새한자동차ㆍ옥포조선소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그룹의 체질을 중화학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위기를 이겨낸 불굴의 도전정신=1970년대에는 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더욱 강력한 '경제위기 쓰나미'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1973년과 1978년 두 번에 걸쳐 발생한 '오일쇼크'가 그것. 경공업 중심의 취약한 경제구조에서 중화학산업을 육성하려던 한국경제에도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석유를 전부 수입에 의존했던 한국은 엄청난 인플레이션 압박과 수출급감으로 그야말로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 1차 오일쇼크 때는 1년 전인 1972년 9억달러였던 무역적자가 1974년 24억달러로 세 배 가까이 급증했을 정도다.

위기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 호'에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해결사로 나섰다. 최 회장이 이란의 석유수출 금지로 촉발된 2차 오일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와 하루 5만배럴의 원유를 수입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 사우디 정부가 최 회장을 믿고 벨기에로 향할 예정이었던 물량을 한국으로 돌린 것이다. 당시 하루 5만배럴이면 국내 수급안정이 가능할 정도의 물량이었다. 최 회장은 1차 오일쇼크가 왔던 1973년에 '섬유에서 석유까지 수직 계열화'라는 사업 모델을 개발하고 꾸준히 석유사업을 추진했지만 1차 오일쇼크로 사업화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꿈을 접지 않고 중동지역 관계자들과 꾸준히 관계를 맺어온 덕에 1978년 2차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데도 기업인들이 앞장섰다. '오일머니'를 벌어들인 중동시장에 진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선봉에는 정 회장이 섰다. 형제들을 비롯해 주변의 모든 사람이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벌려면 돈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 회장의 노력으로 현대그룹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 공사로 꼽히던 사우디 주베일항만 공사를 9억달러에 수주했다. 정 회장이 물꼬를 트자 국내 기업인들의 '중동 러시 붐'이 일었다. 1970년대 말에 일어난 중동 붐은 오일쇼크 위기극복의 견인차 역할은 물론 1980년대 한국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주춧돌이 됐다.

 

제철·조선등 6개 중화학산업 집중 육성                                                                        

                       

한국경제 1970년대 체질개선으로 '질적 도약'

 

지난 1970년대 한국경제는 체질개선으로 질적 도약을 이뤄냈다. 1972년 유신체제를 통해 장기 집권체제를 갖춘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국정지배력을 바탕으로 산업구조의 무게추를 경공업에서 중화학 산업으로 옮겼다.

1973년 박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산업 육성정책을 밝혔다. 제철ㆍ조선ㆍ금속ㆍ석유화학ㆍ비철금속ㆍ정유 등 6개 업종을 집중 육성해 수출 비중을 높이겠다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민간기업의 중화학 산업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세제혜택, 금융지원, 외자 및 기술도입 촉진 등을 통해 지원에 나섰다. 또 1975년에는 종합무역상사 설립규정을 만들어 일정한 조건을 갖춘 종합상사에는 수출지원 자금을 주고 세금ㆍ외환관리 등의 혜택을 부여했다. 중화학 산업 육성을 통해 수출을 늘려 국부를 쌓겠다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 국내 산업에서 중화학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었다. 1966년 국내 산업구조의 34.1%를 차지했던 중화학 공업은 1975년 45.9%를 기록했다. 1979년에는 52.1%로 마침내 경공업을 앞질렀고 수출에서 중화학 공업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1960년대 10% 미만에서 38.4%까지 증가했다.

정부의 경제지원정책이 몇몇 기업에 집중되자 대규모 자본을 축적한 대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 정책에 부응한 현대ㆍ삼성ㆍ럭키금성(현 LG)ㆍ대우ㆍ선경(현 SK) 등 상위 6대 기업은 조선ㆍ자동차ㆍ반도체시장 등에 진출하며 사세를 크게 확장했다. 6개 기업의 매출액은 1973년 4,000억여원에서 1980년 14조7,000억여원으로 급증했고 계열사 숫자도 116개에서 308개로 크게 늘어났다.

 

(사진설명) 

1,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전자공업 생산라인을 살펴보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1970년대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신념으로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자산업에 본격 진출해 글로벌 기업인 삼성전자의 기반을 닦았다. /사진제공=삼성전자 

2,고(故) 정주영(왼쪽) 현대그룹 회장이 작업복 차림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 197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 때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해 '중동진출 붐'을 일으키며 위기극복의 첨병 역할을 했다. /사진제공=현대중공업

 

김민형기자 kmh204@sed.co.kr

입력시간 : 2010/07/15 17:56:16

 

 

[그레이트 체인지 코리아] 시장경제·성숙한 시민의식이 '80년대 성장 드라마'의 원천

 

2부. 고성장 신화 이끈 '5대 정신' ③ 역동의 정신…다이내믹 코리아
정부서 과감히 규제 풀자 기업은 적극 투자로 화답
88 올림픽 성공 개최로 세계속 한국 위상 높아져… 국민 자긍심도 최고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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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대는 한국경제가 정부주도의 계획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대변혁기였다. 이때 시장중심의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으며 민주화 운동으로 시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1987년 민주항쟁을 통해 형성된 시민적 자아는 올림픽의 개최 성공과 눈부신 경제성장을 밑거름으로 더욱 성장하며 훗날 역동적 한국사회, 즉 '다이내믹 코리아'를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시민들의 열정과 참여의식은 1990년 국가 부도 위기의 극복,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맹아(盲兒)가 됐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세계 무대에 긍정적인 존재감을 알리고 스스로도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시장경제 싹튼 1980년대 초=1980년대는 정부주도 경제운용에서 시장 중심 경제로, 산업 보호에서 수입개방과 경쟁촉진으로 경제정책의 큰 틀이 바뀐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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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정부 주도하에 성장해왔던 한국경제는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암초에 부딪혔다. 두자릿수 이상의 고통스런 인플레가 지속됐으며 1980년에는 급기야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정부는 이에 규제 완화와 시장개방을 통해 민간 주도형 경제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정부 규모가 커지다 보면 정부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며 "민간 자생력을 동력으로 한국경제가 효율적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한 시기가 1980년대"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과감하게 규제를 풀자 기업과 가계는 적극적인 투자와 소비에 나섰다. 조선, 정보기술(IT), 자동차 등 오늘날의 한국을 먹여 살리고 있는 주요 산업에 대한 대기업들의 집중적인 설비 투자가 1980년대 이뤄졌다. 동시에 시장경제의 기반이 되는 법과 제도들도 정비되기 시작했다.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1980년 공정거래법이 만들어졌으며 1982년에는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으로 금융실명제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1988년부터는 10인 이상 사업장 대상으로 국민연금제도가 실시됐다.

◇민주화 운동으로 싹튼 시민적 자아=1980년대는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암울하게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 눌렸던 시민적 에너지는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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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중반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성숙되면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꽃피게 된다. 정부는 '6ㆍ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단행하고 언론 자유 보장을 약속한다. 이 같은 민주화 열기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며 전국에서 노동조합이 봇물 터지듯 결성된다.

경제성장에 따른 분배 요구가 커지며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인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같은 변화는 임금 인상으로 국가 경쟁력이 하락하고 사회 분열을 초래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러나 소

 


득수준의 향상은 내수 시장 확대의 기반이 됐으며 개발도상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국민적 자신감의 근거가 됐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장채철 시티글로벌마켓증권 이코노미스트는 "1987년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억압돼왔던 임금이 상승하면서 내수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커졌다"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즉 포디즘이 한국 경제에서 자리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민주화 운동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투명하고 민주적인 정치체제 확립의 발판을 갖추게 된다.

◇소비 주체로 전면에 부각한 국민=1980년대에는 국민이 소비의 주체로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전만 해도 정부가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률을 높이기 위해 '소비=사치'라는 인식을 주입하며 소비를 억제해왔다. 그러나 높아진 임금수준, 민간주도 경제가 발달하면서 TVㆍ컴퓨터ㆍ자동차를 가정에서 소유하게 됐다. 마이카 시대가 열린 것도 1980년대다. 1980년 18만대도 미치지 못했던 자가용 승용차가 1990년에는 10배 이상 증가한 190만대를 기록했다.

야간통행금지와 해외여행 제한 등의 규제 해제는 국민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해제로 밤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됐고 억압된 분위기에서 해방됐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한국민이 '우물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외부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올림픽 개최로 경제발전ㆍ시민의식 절정=1988년 올림픽을 전후해 한국경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경제성장을 이룬다. 1986~1988년 3년간 한국경제는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3% 미만의 물가안정을 기록했다. 연 100억달러를 웃도는 국제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이는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라는 3저 현상이 밑바탕이 됐다. 여기에 1980년대 초부터 경제개방 속에 기업의 공격적인 투자와 경쟁ㆍ혁신 등이 지속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윤종원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대외 여건은 때에 따라 좋기도, 나쁘기도 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충분조건은 아니다"라며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적자원, 거시경제의 안정, 경제사회 전반의 인프라 등 3박자가 갖춰졌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사회·경제 한단계 도약 이끈 촉매제 88 서울올림픽-2002 한·일 월드컵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스포츠 행사를 뛰어넘어 한 나라의 사회 경제적 지형을 바꿔 놓기도 한다. 메가 이벤트 효과는 선진국보다는 개발도상국일수록 극대화된다.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월드컵은 사회 변화의 촉매제가 된 대표적인 메가 이벤트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1980년대 경제 발전과 맞물리면서 그 효과가 배가 됐다. 당시 올림픽 모토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가 상징하듯 서울올림픽은 한국에는 대외 개방의 촉매제 역할을 한 동시에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올림픽 이후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달라졌다. 특히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불었던 냉전 화해 무드는 우리나라가 활발한 동유럽 외교를 펼치는 데 기반이 됐다.

경제효과도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올림픽의 총 생산유발효과는 4조7,504억원, 고용효과는 33만6,000명, 외화수입은 5억2,100만달러, 국제수지 개선효과 4억3,400만달러 등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중한 결과는 국민들의 민족적 자긍심 고취, 자신감 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효과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올림픽 개최 이후 사회 색깔이 바뀐 것 같았다. 이전이 무채색이었다면 이후는 유채색이었다. 문화도 개방적으로 바뀌었으며 다소 수동적인 분위기에서 적극적이고 환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로 심어졌던 국제무대에서의 자신감은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절정을 이뤘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굳어졌던 한국의 이미지가 역동적이고 활기찬 '다이내믹 코리아'로 바뀌었다. 특히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벌어진 국민들의 자발적인 거리응원 문화가 전세계적인 전파를 타면서 한국의 이미지는 외환위기 국가에서 젊고 역동적인 국가로 전세계인의 뇌리에 자리했다.

월드컵 이후에는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이 세계로 뻗어가면서 이를 활용하는 기업들의 글로벌 마케팅도 가속화된다. 특히 삼성이 영국 프리미어리그팀 첼시를, 현대차는 3년 연속 월드컵을 공식 후원하면서 국내 대기업이 전세계 소비자들에게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혜진기자 hasim@sed.co.kr

입력시간 : 2010/07/19 18:01:18

 

 

[그레이트 체인지 코리아] 2부 ④ 위기 극복의 정신…고난을 이겨내다

 

'섣부른 축배' 보다는 "위기는 반복된다" 교훈 되새겨야
오일쇼크·외환 위기, 도전 의식·국민 결집력으로 극복
경기 회복 불구 '고용없는 성장'등 후유증도 만만찮아
일자리·빈부격차 해소 위한 위기대응 시스템 구축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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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0년대 석유파동, 1990년대 말 외환위기도 극복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번 위기도 한두 해가 지나면 풀릴 겁니다. 이럴 때일수록 기죽거나 위기에 휘둘리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배후의 뜻을 냉철히 봐야 합니다."

지난 봄 열반에 든 법정스님의 말처럼 대한민국 경제개발 60년은 도전과 기회의 연속이었다. 도전과 시련을 극복한 힘은 뒤이어 또 다른 성공의 역사를 만들며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찬사는 '강력한 견제'를 동반한다는 점을 잊고 있다. 위기는 반복된다. 잠깐의 '자아도취'는 반복되는 위기의 함정에 빠져 과거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국제금융 정책라인을 이끌었던 김용덕 전 금융감독원장은 "갈수록 금융위기 발생주기가 짧아지고 폐해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위기의 원인과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위기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국운(國運)은 위기(危機)에서 온다=환위기 하면 보통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시절을 떠올린다. 하지만 우리나라 외환위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첫 번째 외환위기는 1967년. 아직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지 못했던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막대한 산업기반시설 투자는 경상수지 적자폭증으로 이어졌다. 당시 적자는 대일청구권 자금, 베트남 파병이라는 역사의 아픔을 대가로 치렀다.

 

위기에 이은 기회는 모래사막에서 찾아왔다. 1974년 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은 한국경제를 파산위기까지 내몰았다. 1973년 10월부터 1975년 여름까지 한국경제는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감산과 가격 4배 인상으로 극심한 물가파동에 시달렸다. 당시 한국이 지불한 원유값은 1973년 3억달러에서 이듬해 8억달러로 급증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20억달러가 넘었다.

"오일쇼크로 발생한 외환위기의 처방은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찾으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문은 1976년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따낸 '주베일 항만공사'라는 역작을 탄생시켰다. 1975년 여름 박 대통령은 당시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왔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작자들이 있다. 만약 임자도 못할 것 같으면 나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중동으로 출발한 정 회장은 5일 만에 돌아와 박 대통령에게 이런 보고를 했다.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를 하기에 제일 좋은 지역이다. 비가 오지 않으니 1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다.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다." 무모하리만큼 저돌적인 도전은 위기를 기회로 국가의 운을 트이게 하며 2010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수주의 주춧돌이 됐다.

◇섣부른 축배는 위기를 부른다=1996년 12월, 20년 전 국민소득 1,000달러에 불과하던 대한민국이 국민소득 1만달러를 넘어서며 선진국의 모임이라고 여겨지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OECD 가입이라는 이벤트로 국민 모두는 선진국 진입의 장밋빛 꿈에 젖게 됐다. 10개월 뒤 찾아올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는 예상도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의 가장 큰 위기로 평가된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우선 대내적으로 관치금융과 과도한 기업의 외형경쟁에 따른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이다. 1997년 1월 한보철강, 3월 삼미그룹, 4월 진로그룹으로 이어진 연쇄파산은 10월 기아차의 법정관리로 극에 달했다. 여기다 태국에서 시작된 유동성 위기는 필리핀ㆍ인도네시아ㆍ말레이시아 등을 거쳐 1997년 12월3일 IMF로부터 55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는 치욕을 겪게 된다.

외환위기 당시 경제성장률은 1996년 7%, 1997년 4.7%에서 1998년 -6.9%로 곤두박질친다. 1998년에는 민간소비가 -13.4%, 건설투자와 설비투자가 각각 -12.4%, -42.3%를 기록하며 극심한 내수침체를 겪는다. 특히 환율급등으로 소비자물가는 7.5%를 기록하며 저성장ㆍ고물가의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기도 했다.

◇위기의 진폭과 강도는 커진다=외환위기 이후 10년,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1998년과 달랐다. 위기에 대한 내성으로 다져진 체력(대외건전성ㆍ외환보유액 등)은 강해졌지만 10년 뒤 다시 찾아온 위기 때는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선진국들의 경제성장률이 일본을 제외하고 높은 성장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2008년 위기로 선진국은 물론 전세계가 침체에 빠져들었다. 부동산 가격 장기하락과 신용경색이 동반된 경기침체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처음이다.

혹자는 외환위기 극복의 특징을 '역동성'이라고 말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 결코 등을 돌리지 않은 국민들의 자발적인 위기극복 의지가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운동으로 모은 금은 200톤이 넘었으며 금액으로는 22억달러에 달했다.

문제는 위기극복을 국민들의 역동성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기의 사이클은 이제 한층 더 자주 강한 강도로 찾아오고 있다. 여기다 재정건전성 악화, 고용 없는 성장 등의 빠른 경기회복에 따른 후유증은 냉정한 위기대응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신후식 국회예산정책처 거시경제분석팀장은 "외환위기 이후보다 경제주체들의 건전성 지표는 좋아졌지만 대외여건은 크게 악화됐다"며 "수출은 더 이상 우리 경제 위기극복의 만능 키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출감소를 예상한 내수부양 정책과 일자리 창출, 또 빈부격차를 줄이는 동시에 저소득층ㆍ서민층에 대한 긴급복지 등을 통한 사회안전망 구축 등 위기대응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IMF 권고에 충실…한국은 패배자?                                                                             

 

환란중 대표기업들 외국 자본에 넘어가고 실업 폭풍
말聯은 권고 거부, 외환유출 통제로 자력 극복 '대조'

 

분명히 대한민국은 지난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의 성공모델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성공이 아무런 후유증도 없는 완벽한 성공일까.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한국이 2008년 금융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분석한다. 신 교수는 "이번 세계 금융위기는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받아들인 국제통화기금(IMF)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실패작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계기"라며 "IMF 패러다임이 유일하게 내세웠던 논거는 '금융안정성'이었지만 한국은 이번에도 다시 금융위기를 겪었다"고 지적했다. 결국 외환위기 당시 IMF의 주문에 따른 구조조정은 어디까지나 투기꾼의 입맛에 맞는 성공이었다는 논리다.

IMF도 외환위기 극복 10년이 지난 지금 당시 구조조정 모델이 100%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자인한다. 도미니크 스토로스칸 IMF 총재는 최근 대전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외환위기 당시 필요 이상의 고통을 안겼다"며 IMF의 구제금융 처방이 잘못됐음을 시인했다.

왜 외환위기 당시 정답으로만 여겨졌던 IMF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10년이 지난 지금 쏟아지는 것일까.

1997년 당시 우리나라와 똑같은 외환위기를 겪으며 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말레이시아. 해외자본에 의한 성장이 한계를 맞으며 동일한 위기를 겪었지만 말레이시아와 한국 정부의 위기극복 해법은 전혀 달랐다. 한국은 IMF의 권고사항을 충실히 따랐다. 금리를 올리고 부실은행과 기업을 합병 또는 정리하며 인력을 감축했다. 후유증은 컸다. 대표기업이 외국자본에 넘어갔고 실업의 폭풍은 눈물의 외환위기를 겪게 했다.

말레이시아는 어땠을까. 말레이시아는 당시 외환위기를 투기자본의 일시적인 시장교란으로 판단해 IMF의 권고안을 거부했다. 대신 말레이시아에 들어와 있는 외환 유출을 통제하고 해외의 자국통화를 회수하며 고정환율제를 택했다. 세계 경제전문가들이 모두 비웃는 가운데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는 조지 소로스를 '사악한 투기꾼'이라고 부르며 말레이시아에 발도 못 붙이게 했다.

어려운 경제논리보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한국은 당시 유학생들을 조기 귀국시키는 한편 한시적으로 교육제도를 바꿔 국내 대학으로 끌어들였다. 반면 마하티르 총리는 기업에 유학생들이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지 10년이 지났다. 성공모델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지기보다보다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현수기자 hskim@sed.co.kr

입력시간 : 2010/07/21 16:42:54

 

 

[그레이트 체인지 코리아] '수출立國' 반세기…원조받던 변방서 '세계의 심장'으로

 

2부. 고성장 신화 이끈 '5대 정신' ⑤ 글로벌화의 정신…세계를 향하다
환란때 뼈깎는 구조조정·힘 비축해 금융위기때 국제공조 선도국 부상
G20·핵안보 정상회의 잇달아 유치 명실상부한 글로벌 리더 자리매김
이젠 성공모델 베푸는 나라로 우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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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당시 48세)은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102년이 지난 2009년 9월, 우리나라는 2010년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유치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세계에서 가장 빨리 극복하며 새롭게 재편된 세계 경제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지난 반 세기 전쟁의 잿더미에서 소득 2만달러 국가로 우뚝 선 데에는 우물 안 개구리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글로벌화의 정신이 있었다. 그 결과 1957년 1인당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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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소득(GNI) 74달러의 세계 최빈국은 이제 G20 정상회의와 핵안보 정상회의를 동시에 개최하며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 변신한 국가가 됐다.

◇수출입국 정책, 글로벌 정신의 시작=1964년, 우리나라 총수출이 1억달러를 돌파했다. 북한은 이미 4년 전에 총수출 2억 달러를 넘어서며 저만치 앞서 갔지만 북한과 남한은 이 때부터 서서히 운명을 달리하기 시작한다. 북한이 민족적 자립경제를 내세우는 동안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직접 매주 주재하는 수출진흥위원회를 출범하며 매년 수출계획을 수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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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진도율을 체크하며 독려했다. 1960년 3,200만달러였던 수출은 1964년 1억달러, 1970년에 10억달러를 돌파하며 우리도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의 쾌거를 이뤘지만 우리의 세계화는 김영삼 대통령이 제창한 'Segyewha'라는 구호만 남발하는 어설픈 수준이었다. 위기도 그만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경제성장률이 1998년 -6.9%까지 고꾸라지면서 아시아의 4마리 용에서 지렁이로 전락했다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IMF 총재가 "한국은 외환위기 당시 필요 이상의 너무 큰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지만, 위기를 통해 재정건전성과 외환보유고를 확보하고 뼈를 깎은 기업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재도약의 기틀을 다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기회를 잡은 한국=한국의 글로벌 정신은 외교무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91년에야 비로소 유엔에 가입한 우리나라는 불과 10년 만인 2001년 유엔총회 의장국이 됐고 2006년 한국인 최초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하며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우리나라는 축적해 놓은 경쟁력을 한껏 뽐냈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40%도 안 되는 국가재정과 2,000억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로 무장해 위기 이후 가장 빠른 회복을 거둔 나라로 꼽혔다. 이 같은 성적표는 올 11월 G20 정상회의를 유치하게 된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가 G20 정상회의를 유치한 건 아시아 국가, 비G8 국가로는 처음으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 체제에서 우리나라가 선도국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2012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까지 개최하게 되며 우리나라는 명실상부하게 정치와 경제, 외교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됐다.

◇원조 수여국에서 공여국으로=지난해 10월, 서울 한남동 유엔개발계획(UNDP) 한국사무소가 문을 닫았다. 1963년 설치돼 우리나라에 각종 원조사업을 벌였던 곳으로 우리나라가 바야흐로 원조 공여국이 됐다는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헬란 클라크 UNDP 총재는 "한국은 이제 자신의 발전 경험을 다른 개도국들에게 널리 전수해야 한다"며 한국의 정치ㆍ경제 성공을 다른 나라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OECD에 가입한 지 13년 만에 우리나라는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했다. 선진국 중 다른 나라에 원조를 해 주는 국가의 모임으로 세계에서 미국과 일본, 유럽 등 23개국만 가입한 그야말로 알짜 선진국 모임이다. 아직 우리나라의 ODA 비율은 GNI 대비 0.1%로 DAC 회원국 24개국 중 꼴찌이지만 2012년에는 0.15%, 2015년에는 0.25%까지 높인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보다 효율적인 원조를 위해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KSP)를 정리해 개발 도상국들에게 전수할 계획이다. 이른바 한국형 ODA 모델을 만든다는 야심찬 포부다. 수출입국 정책부터 새마을 운동 등 우수정책들을 중심으로 2012년까지 100개의 대표 프로그램을 개발, 개발도상국들이 따라 배울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2004년 시작된 KSP 사업은 지난해까지 15개국 134개 과제에 대해 정책자문을 했다. 베트남에 2011~2020년 중기 발전계획을 세운 게 대표적 사례다. 정부 관계자는 "유상 원조와 일부 무상원조, 국제금융기구를 통한 다자원조 등을 아울러 원조에 있어서도 전세계가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 예정"이라며 "단순히 지원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데 한국형 원조의 기틀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G20 서울회의서 세계 경제질서 새로 짠다                                                                   

 

재정관리·금융안전망 구축
개도국에 성장 노하우 전수등 파워 정상들 의견조율의 場

 

오는 11월 11~12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전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데이비드 카메론 영국 총리 등 세계를 이끌어가는 파워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오는 11월 열리는 G20 서울 정상회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마무리된 뒤 그 이후를 논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경제질서의 판도를 새로 짜는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08년 9월 워싱턴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올 6월 토론토까지 총 4차례 G20 정상회의가 열렸지만 모두 글로벌 금융위기를 어떻게 헤쳐갈 지를 두고 머리를 맞대는 자리였다.

서울 정상회의에서는 현 경제상황을 점검하면서 유럽발 위기로 불거진 재정건전성 강화 방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이제까지는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지'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재정을 관리해 나가야 할 지가 미래의 위기를 막는 예방적 조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한 협력체계(Framework)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의제다.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선 더 이상 개별 국가들의 각론에만 맡길 수 없는 만큼 G20 정상회의를 통해 국제적 공조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개발도상국의 소비 증대와 위안화 절상.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팽팽한 가운데 "환율은 주권"이라고 강경하게 나오는 중국의 입장을 어떻게 조율할 지가 관건이다.

우리나라는 글로벌 금융안전망과 개발(Development)을 이른바 '코리아 이니셔티브'로 들고 나온다는 전략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잇는 가교임을 자부하는 만큼 급격한 외화유출입에 따른 충격을 막기 위해 양자간, 다자간, 지역간 금융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또 개발도상국과 빈곤국에 단순히 경제적 지원을 넘어 경제성장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개발 원조를 본격화해야 한다는 의제도 제시할 예정이다. 우리의 주장을 선진국들에게 설득시켜 결과물을 내놓는 작업이 결코 만만치만은 않다.

사공일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장은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에서 G20 체제가 뿌리를 내리고 강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서울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가능하고 균형성장을 위해 각 나라가 어떤 정책패키지를 채택할 지 여부"라고 말했다.


(사진설명)

1,지난 4월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 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울경제DB

2,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7월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G20 셰르파 회의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서울경제DB

 

이상훈기자 flat@sed.co.kr

입력시간 : 2010/07/26 16:5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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